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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으으~ 싫다, 진짜! ‘무슨무슨 러’

by 이우기, yiwoogi 2016. 12. 26.

말이란 의사소통의 도구이다. 글자(문자)도 마찬가지이다. 글자는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려는 말을 붙잡아 두는 도구이다. 요즘은 녹화 기술이 워낙 발전하여 말도 붙들어 둘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말과 글은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니까 의사소통이라는 목적만 잘 달성하면 된다. 이렇게 말해 놓고 나면 뭔가 찜찜하다. 과연 말과 글이 의사소통의 역할만 하면 끝인가. 일단 그렇다고 치자.

 

의사소통도 잘해야 한다. 한 사람이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다르게 해석하게 되면 안 된다. 큰 싸움이 날 수도 있다. “사랑해라고 말했는데, ‘미워해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같은 말을 써야 한다. 외국인과 대화할 때는 내가 외국어를 하거나,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 통역자를 두어야 한다. 그래야 싸움이 나지 않는다.

 

신문이나 방송, 페이스북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보면 낯선 말을 많이 보게 된다. 나이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말을 주고 받을 수도 있다.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쓸 수도 있다. 유행어, 신조어, 은어, 비어, 속어, 사투리, 고장말, 방언 이런 말들은 대개 모든 사람이 잘 알아듣는 말이라기보다 특정한 사람들끼리만 잘 알아듣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말들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 나쁘다, 훌륭하다 따위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다. 유행어는 유행어로서 제 구실이 있는 것이고 은어는 은어대로 필요할 때가 있다. 사투리, 방언은 말글살이를 가멸지게 해주는 역할이 있다. 따라서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유행어, 신조어들을 어떻네 저떻네 가타부타 시비 걸 까닭이 없다. 유행어는 한때 유행하다가 사라질 말이기 때문에 그렇고, 신조어는 처음에는 신조어였다가 점점 고임을 받게 되면 표준어로 올라설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유행어, 신조어, 은어, 비어, 속어, 사투리, 고장말, 방언 같은 것을 쓰려면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친구들끼리 마주앉은 술자리에서야 뭐라고 해도 괜찮겠지. 교사나 교수가 강단에 서서 은어, 비어를 쓰면 학생들로부터 쫓겨나게 될지 모른다.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나 사회자가 방언을 쓰면, 많은 경우 자격에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 페이스북, 트위트, 인스타그램 같은 데서는 말을 주고받는 상대가 정해져 있거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다른 경우보다는 굉장히 너그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양보하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국어 학자이든, 국문학과 출신 사람이든, 평소 말글살이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누군가는 잘못된 것에 대하여 지적해 줘야 한다고 본다. 지적한다고 하여 유행어가 어느 순간 사라지거나 은어, 속어가 꼬리를 감추거나 하지는 않는다. 사투리가 모두 사라지고 모든 시민이 표준어를 쓰는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터진 둑이라고 내버려두면 쏟아져내리는 물줄기는 논밭도 쓸어가고 집도 쓸어가고 경운기도 쓸어가고 정자나무도 뿌리째 뽑아가게 된다. 걷잡을 수 없는 대세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끝까지 못둑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한 사람이 있음으로써 잘못 만들어진 유행어는 더 짧은 시간에 소멸되고, 은어와 비어, 속어도 적당한 선에서 생겨나고 쓰여지고 사라지고 한다고 본다. 방언은 어느 지역에서는 멋진 말이고 전체적으로는 말글살이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지만 그것이 곧 공식문서를 기록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민들이 알게 된다. 못둑을 지키고 선 사람이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큰비로 인하여 넘쳐 흐르는 물을 완전히 막을 수 없듯이, 국어학자, 말글에 관심 가진 이들이 두 눈 부릅뜨고 지킨다고 하더라도 시민들의 모든 말글살이를 사사건건 간섭하고 단속할 수는 없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절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전제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대하면 참, 할 말을 잃게 된다. 이런 말들 가운데 한두 번은 들어보거나 써본 적이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보았거나, 혹은 아들 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들어봤을 것이다. 라면러, 통학러, 먹방러, 개콘러, 치킨러, 게임러, 노예러, 진실러, 수집러, 도색러, 자작러, 검색러, 댓글러, 악플러, 마약러, 지방러. 어떤가. 귀로 들어보거나 눈으로 읽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러한 말을 보고들으면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이런 상황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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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찾아봐도 이런 기사 제목이 쏟아져 나온다. 개인 블로그나 페이스북 같은 데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무엇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라고 한다. 완전한 문법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기 어려우니 접미사라고 할 수 없다. 그냥 그런 뜻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라면러는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 또는 라면을 잘 끓이는 사람이라는 말이겠다. 먹방러는 먹방을 만드는 사람 또는 먹방을 즐겨 보는 사람이다. 댓글러는 인터넷 게시글에 댓글을 열심히 다는 사람이겠다. 지방러는 지방에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겠지.


 

어떤 명사에다가 ‘~라고 붙이기만 하면 되므로 참 편리한 말 만들기(신조어)이다. 이 말을 주로 쓰는 10, 20, 30대들은 아무런 거부감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이 말을 난생 처음 듣는 사람이야 알아듣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남들이 쓰지 않던 ‘~를 개발해 내고서는 쾌재를 부르기도 하는가 보다. 위에 보기로 든 것 가운데 몇몇 개는 대강 알아듣겠는데 몇몇 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실제 쓰이고 있는 ‘~는 이보다 수십 배 많을 것이다.

 

‘~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보았다. 영어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er’에서 왔다는 게 정설이다. 가령 노래라는 말 ‘sing’에서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말, 즉 가수는 ‘singer’가 되었다. 게임 ‘game’에서 ‘er’을 붙이면 게임을 하는 사람 즉 ‘gamer’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기서 er를 가져와서 우리말 명사에 아무렇게나 붙여 무엇을 하는 사람의 뜻으로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로서는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학설이다.

 

그런데 영어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는 접미사는 ‘~er’만 있는 게 아니다. 또 반대로 ‘~er’이 붙은 말이라고 해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 것도 아니다. 또 한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어에서는 ‘~er’이 붙어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고 하더라도 발음은 ‘~로 나는 게 아니다. 앞에서 보기로 든 말은 실제 발음은 싱어’, ‘게이머가 된다. 그러니까 ‘~는 영어에서 온 것 같기는 하지만 영어 용법과도 맞지 않는, 완전히 낯설고 어색한 신조어인 것이다. 누군가 재미로 한두 번 쓰던 게 인터넷망을 통하여 삽시간에 널리 번진 게 아닌가 의심해 본다. 그 가운데 신문과 방송, 그리고 사회관계망서비스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 ‘~를 쓰지 말자고 할 것인가. 그건 그렇지 않다. 내버려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질 것이다. 어쩌면 꽤 오랫동안 쓰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무엇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접미사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 가능성을 0.1%도 되지 않는다고 보지만, 더 높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말이란 그런 것이다.

 

이 말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 사람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러 작작 써라. 졸라 한심해서 말하는데 무개념 ○○?”라고 썼고, 한 사람은 트위트에서 으으 싫다 진짜 무슨무슨 러라고 썼다. 또 어떤 사람은 뭐 대단한 거라도 되는 마냥 ~러 붙이는 거 같잖고 웃기네라고 했다.

 

우리말 가운데 ‘~’, ‘~쟁이가 있다. 나무를 하는 사람은 나무꾼, 재주를 잘 부리는 사람은 재주꾼, 아편을 태우는 사람은 아편쟁이, 개구진 장난을 잘 치는 어린이는 개구쟁이이다. ‘~’, ‘~은 좀 점잖은 편에 속한다. 예언가, 미술가, 작가, 예술인 등등.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을 라면쟁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댓글을 잘 다는 사람을 댓글쟁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댓글 가운데 악플을 잘 다는 나쁜놈은 악플꾼이라고 불러줄 만하다. 지방에 사는 사람이야 그냥 지방사람이지. 이처럼 이미 있는 적당한 말을 가져다 쓰면 된다. 근본도 모르고 쓰임도 틀린 ‘~를 굳이 쓸 까닭이 없다.

 

‘~를 잘 쓰는 사람이 나날살이에서 이 말을 쓴다고 상상해 보자. 그 사람이 20대라고 상정해 보자.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 말을 알아들을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물론, 그에 앞서 생각이 있는 젊은이라면 부모와 조부모 앞에서 감히 이런 말을 쓸 생각을 하지 않겠지. 자기들끼리 모여 시시덕거리며 놀 때 소주러, 맥주러, 치킨러, 라면러, 담배러하면서 쓰겠지. 그러다가 어느날 자기의 말글살이를 되돌아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심하게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을지도 모른다. 이런 지적은, 사실 하나마나이다. 말과 글 속에 이미 생명의 싹이 들어 있으니까. 생명의 싹에 물과 온도를 잘 맞춰주면 살아남을 것이고,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내팽개치면 얼마 못 가서 죽고 말 테니까.

 

2016. 1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