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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고맙다, 블랙박스야!

by 이우기, yiwoogi 2017. 1. 4.

블랙박스(Black Box)는 비행 중인 항공기의 성능과 상태 등을 기록하는 장치로, 항공기 사고가 발생했을 때에 원인을 밝혀주는 구실을 한다. 항공기 사고가 나면 이 블랙박스를 찾는다, 회수한다고 난리법석을 떠는데 그 안에 사고와 관련한 여러 가지 기록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블랙박스에서 착안하여 자동차용 블랙박스가 개발된 건 꽤 오래된 것 같다.

 

지금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20074월에 샀다. 그로부터 몇 해 뒤 어느 아주머니가 사무실로 불쑥 찾아와 국민카드를 새로 가입하면 블랙박스를 하나 준다고 꼬드겼다. 당시에 많은 사람이 블랙박스를 새로 사 달곤 했는데, 나도 꼬임에 빠져 카드에 가입하고 블랙박스를 하나 달았다. 그러고서 오륙 년은 지난 듯하다. 그 뒤 자동차 종합보험 가입할 때 블랙박스가 달려 있다는 이유로 보험료를 깎아주곤 했다. 결과적으로 손해 본 짓은 아니었다.

 

그 블랙박스가 지난해 여름부터 오작동하기 시작했다. 저장용 카드를 꺼내어 포맷한 뒤 새로 끼우면 정상 작동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경고 소리를 내곤 했다. 그렇지만 새로 하나 장만하자면 최소 20만 원은 들겠거니 싶어 참고 또 참았다. 11월경 저녁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아주 많은 교통사고의 원인을 블랙박스가 처리해 주었고 제법 많은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것을 막아주기도 했다는 내용이 방송되었다. 블랙박스 제작 업자들이 후원한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아내는 돈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이참에 바꿔 달자고 졸랐다. 따라야 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주변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얻었다. 우리 동네에 있는 전문 업체를 방문하여 상담해 보기도 했다. 비싸고 좋은 건 100만 원을 웃돌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30만 원은 들게 생겼다. 그러다가 기아자동차에 다니는 동생으로부터 어찌어찌 하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싼값에 살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지난해 1212일 자동차용 블랙박스를 새로 사 달았다.

 

아이나비 블랙박스 v300이라는 것인데 신제품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구닥다리도 아니어서 내 차와 수명을 같이하기에 적절해 보였다. 장착하는 것까지 15만 원 줬다. 앞쪽뿐만 아니라 뒤쪽도 찍고 저장한다. 앞 유리 천장 부분에 카메라가 하나 달렸고 뒷유리 윗부분에도 또 하나 달렸는데, 이 두 개 카메라와 자동차 전원을 연결하는 전기선을 모두 잘도 감추어 주었다. 이전에 있던 것에 견주면 최첨단 신문물이라고 할 만했다. 만족스러웠다. 사고는 당하지도 말아야 하고 내지도 않아야 하겠지만, 불가피하게 사고가 생기더라도 웬만한 것은 이 블랙박스에 의지하여 원인을 규명할 수 있겠다 싶었다.

 

블랙박스는 일상적으로 나의 운전 습관을 동영상으로 찍고 저장한다. 자동차 안에서 나는 소리도 녹음한다. 급정거를 하거나 과속방지턱을 과속으로 넘어가면 경고 소리를 낸다. 보통 때 찍은 영상과 경고 소리를 낼 때 찍은 영상은 따로 저장한다. 급정거, 급가속과 같은 상황은 사고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기계가 일단 사고라고 인식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 시점으로부터 전 10, 10, 합하여 20초를 저장한다. 실세 사고가 난다고 가정하면 20초 정도의 시간 안에 모든 상황이 발생하고 종료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럴 것 같다.

 

출퇴근 길에 과속방지턱이 몇 개나 될까. 과속방지턱은 아니지만 길이 움푹 패어 있는 곳고 있고 도로공사를 한 뒤 마무리를 깔끔하게 하지 않고 가버리는 바람에 도로가 울퉁불퉁한 곳도 있다. 이전에는 이런 곳을 지날 때 시속 40~60km로 달렸다. 차가 좀 흔들렸지만 불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차 안에 다른 손님이 타고 있을 때는 조금 조심하긴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달리기도 했다. 큰 사고를 낸 적은 없지만, 지금 차의 살갗을 보면 이래저래 적잖이 긁힌 것을 알 수 있다. 운전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수도 없이 많이 다짐했지만, 결과적으로,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잘 안 고쳐지는 게 운전습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달려 있는 블랙박스는 차가 조금만 흔들리거나 급정거를 하면 띵똥하며 경고 소리를 낸다. 그다지 듣기 싫은 정도는 아니지만,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아차하며 반성하고 조심해야지라고 다짐한다. 이 블랙박스가 어느 때 소리를 낼 것인지를 정할 수 있다. 반응 감도를 낮음, 보통, 높음 세 단계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 감도는 보통이다. 그러니까 보통의 운전자가 보통의 상황에서 운전할 때를 기준으로 하여 그보다 심하게 차가 흔들리면 여지없이 띵똥소리를 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아침 7시경 집에서 출발하면 아파트 안에서부터 띵똥소리를 듣는다. 맨홀 뚜껑이 지나치게 푹 꺼져 있는데 거기를 지날 때마다 차가 요동치기 때문이다. 아주 천천히 조심조심 운전하면 괜찮겠지만, 번번이 거기서부터 걸린다. 처음에는, 집에서 출발한 뒤 사무실 도착하여 시동을 끌 때까지 열 번 정도는 띵똥소리를 들은 것 같다. 대부분 과속방지턱을 무사히 넘지 못하는 경우이고, 앞서 말한 대로 길 자체가 너무 울퉁불퉁한 경우도 더러 있다. 그랬거나 말거나 띵똥경고 소리를 듣는 것은, 그것도 아침 즐거운 출근길에 듣는 것은 유쾌한 일이 절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요즘은 다섯 번 정도 듣게 되는 것 같다.

 

띵똥소리가 아주 듣기 싫은 정도는 아니지만, 반응 감도를 낮은 단계로 바꿔버릴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블랙박스를 새로 산 것을 계기로 운전습관을 바꿔보자고 다짐한 것이다. 잘 안될 것이다. 1997년부터 20년 가까이 몸에 밴 운전습관이 쉽게 고쳐질 리 없을 것이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한번 도전해 보자 결심한 것이다. 낯선 길에서 갑자기 만나는 과속방지턱은 불가피하게 출렁거리며 넘어가겠지만, 12~13년간 출퇴근한 길, 그래서 좀 심하게 말하면 눈 감고도 다닐 만한 길에서는 미리미리 천천히 운전하고 과속방지턱이나 공사 구간을 지날 때는 더욱 조심하여 띵똥소리 한번도 안 듣고 출퇴근하는 것에 도전해 보고자 한다.

 

성격이 좀 급한 편이다. 겉보기엔 그렇게 안 보일지 모르지만, 화가 나면 무엇을 집어던지기도 잘했다. 집어던지는 건, 몇 해 전 귀중하고 소중하고 연약한 아이폰 5’를 던졌다가, 그 아이폰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후회해본 뒤부터는 던지지 않게 되었다. 전화 수화기를 내리치는 바람에 기판이 부러진 때도 있었다. 요즘은 전화 받다가는 절대 화내지 않는다. 다시 전화기 바꿔달라고 말할 핑곗거리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이러한 나의 성격을 블랙박스에 의지하여 좀 바꿔보고자 한다. 차 안에서 나 혼자 듣는 띵똥경고 소리이지만,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 운전습관을 반성하게 된다. 나의 급하고 불 같은 성격을 후회하게 된다. 블랙박스가 아니라 나에겐 인성교육 전문 선생님이다. 고맙다. 블박아~! 그나저나 이 블랙박스를 쉽고 고운 우리말로 뭐라고 불러줘야 할까. 고민과 연구를 시작해 본다.


2017.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