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 한 그릇 5000원이면 싼 편이다. 이것 저것 넣어달라, 더 맛있게 해달라, 더 많이 달라고 조르기 애매한 값이다. 주는 대로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일어서면서 1만 원 내밀며 거스름돈 기다리기엔 그나마 덜 미안한 정도라고나 할까.
경상대 후문 <밀밭수제비>(https://goo.gl/T51HGH, 055-757-4959)는 딱 그런 집이다. 이런 집에서 원산지 표지판을 일일이 뜯어볼 깜냥까지 갖춘 사람이야 몇이나 될까 싶은데도, 주인은 '우린 이런 집이다'라는 것을 살뜰히 알려주고 싶은가 보다.
젊은 청춘들은 왕돈까스나 칼만두국을 주로 시켜 먹던데, 나는 그냥 수제비를 먹는다. 얇고 넓게 찢어 넣은 수제비 건더기에 어쩌다 마주치는 조개, 냉동임에 분명한 깐새우, 오징어가 반갑다. 미역 사이에 숨어 있던 청양초 덕분에 마른기침 두어 번 하다 보니 어느새 그릇 바닥이 보인다.
가을날 은행잎보다, 화창한 봄날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보다 더 샛노란 단무지 보시기와 몇 년 묵었는지 모르겠는 묵은지 보시기도 할말이 제법 많은 것 같다. 열대여섯 명 앉을락 말락한 좁다란 가게 안에 밥상도, 걸상도 정겹다.
사진에 못 담은 주인 아줌마의 예쁜 웃음도 살갑다. 이전에 경상대 후문 어딘가에서 '강나루식당'을 하였더랬는데, 외상 실컷 긋고 그 길로 발길 끊은 학생들, 스님이 되어 외상값 10만 원 들고 온 어느 졸업생, 급하다며 현금을 빌려가서는 역시 종내 무소식인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짧은 시간에 먹는다.
수십 년 드나든 젊은 손님들, 그 밥으로, 그 고기로, 그 술로, 그 수제비로 모두 건강하게 잘 커서 어디에서든 무엇으로든 제 밥값은 하고 있을 터이니, 그것으로 되었노라는 표정이 얼굴과 웃음에 그득하다.
거창하고 대단하고 훌륭한 식사를 원한다면 지갑에 신용카드나 5만 원 신사임당이 들었는지 미리 채비해야겠지만, 그냥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정다운 친구나 연인이나 동료와 함께라면 수제비나 국수나 떡국이나 무엇으로든 든든히 배를 채울 만한 집이다. 다음에 가면 김치국수와 비빔국수를 먹어봐야겠다.
경상대 후문 대숲 앞 골목안에 숨어 있는 <밀밭수제비>... 아참, 실겅에 소줏잔, 맥줏잔 같은 유리는 안 보이는 것으로 봐서, 또는 차림표에 안주로 삼을 만한 게 없는 것으로 봐서, 이 집은 술집이라기보다는 꼭 밥집이라고 해야겠다.
2016.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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