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붕’이라는 말을 많이들 쓴다. 주로 ‘멘붕이 온다’, ‘멘붕에 빠지다’, 그냥 ‘멘붕’ 이렇게 쓴다. 멘붕은 ‘멘탈 붕괴’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멘탈(mental)은 ‘정신의, 지적인, 마음의, 관념의’라는 말인데, 그냥 정신이라고 보면 된다. 멘탈이 붕괴되었다는 말은 정신이 붕괴되었다는 뜻이다. 정신이 붕괴된 것 즉 정신이 무너진 것은 어떤 상태인가. 한때 ‘맛이 갔다’라는 표현을 더러 쓰곤 했는데, 바로 멘붕과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은 2000년대 말 ‘디시인사이드’의 스타크래프트 갤러리에서 사용되기 시작해 널리 퍼져 나갔다고 한다. 게임에서는 강화에 실패해서 아이템이 사라진 경우, 커뮤니티에서는 키배에서 진 경우, 실생활에서는 당혹스럽거나 창피한 일을 당한 경우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이나 행동을 하면 ‘멘탈(정신)이 붕괴되었다’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키배는 키보드 배틀(KeyBoard Battle)이다. 키보드 배틀은 인터넷 상에서 키보드로 타이핑해서 말싸움을 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이런 말 따라가다 보면 내가 멘붕에 빠질 지경이다.
멘붕은 하도 널리 쓰여 젊은이들 사이의 대화에서는 물론이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텔레비전 자막, 뉴스 화면, 심지어 지성인들의 점잖은 대화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요사이 온 국민이 집단적으로 멘붕에 빠진 경우를 들라고 하면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떠오른다. 사실이냐 아니냐,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 따위로 논란이 증폭되다가 제이티비시(jtbc)가 결정적인 증거인 태블릿 피시를 발견, 그 안에 든 파일들을 공개하였다. 그 뉴스를 본 국민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사실을 감추기 급급했던 청와대와 여당 무리들도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장 심하게 멘붕에 빠진 사람은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몇 가지 보기를 찾아본다. “오너 사퇴 압박까지”…기업들 ‘멘붕’(에스비에스), ‘정글의법칙’ 나라, 솔로 생존 시작…개미 떼 습격에 ‘멘붕’(스포츠서울), 방산업계 ‘최순실 직격탄’…주가 폭락에 ‘멘붕’(머니투데이), 멘붕의 테임즈, 고개 숙인 최악 마무리(오에스이엔), 대통령·황 총리·법무장관 등 지방行 줄줄이 취소… 지자체 ‘멘붕’(서울신문), 최순실게이트-국민 멘붕-국가 위기-국격 추락(한국타임즈), 朴 대통령 지킬까, 빠질까…대구 초선의원 ‘멘붕’(매일신문) 이렇게들 쓰고 있다.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외국어(영어) ‘패닉’이 있다. 패닉(panic)은 ‘공황, 공포, 당황, 두려워하다’라는 뜻이다. 공포, 두려워하다는 느낌이 더 강한 듯 보이지만, 당황스러워 정신을 놓치고 허둥대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멘붕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널리 퍼지기 전에는 패닉이 아주 많이 쓰였다. 물론, 지금도 쓰이긴 하지만 멘붕보다는 적게 쓰이는 듯하고, 뜻도 조금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패닉이 제정신을 잃게 된 경우,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며 허둥대는 상황 등을 가리키니까 멘붕과 같은 말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러고 보니 가수 ‘패닉’도 있었구나. 이 사람들은 어떤 뜻으로 패닉이라는 이름을 썼을까.
패닉이라는 말이 쓰인 보기도 찾아본다. 野 “국가 패닉상태·국민불안 고조…개각 철회해야”(뉴스1), 대선D-5 트럼프 역전가능성에 한인사회 ‘패닉’(뉴스투데이),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마비…인터넷전문은행 ‘연내 출범’ 패닉(미디어펜), 한국증시 패닉 장세 언제까지…불확실성 고조에 투매(연합뉴스), 검찰, 재단 출연기업 전수조사…재계,‘최순실 게이트’로 패닉(브릿지경제), 마음대로 사표도 못 내는 분위기 ‘청와대 패닉’(매일신문), 연관사업 줄줄이 엎어질 판...지자체도 ‘최순실 패닉’(서울신문) 이렇게들 쓰고 있다.
멘붕의 쓰임과 패닉의 쓰임은 같은가, 다른가. 완전히 일치하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두 낱말을 서로 바꿔 놓아도 뜻이 통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비록 영어이긴 하지만 패닉이라고 써도 될 텐데 굳이 멘붕이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 쓸 까닭은 없었다고 본다. 일부 계층에서 신조어, 유행어로 쓰더라도 멀쩡한 언론과 방송인, 정치인들까지 갖다 쓸 까닭은 없었다. 너도나도 쓰니까 줏대 없이 따라 쓴 사람이 많을 것이고, 그런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지금처럼 더욱 널리 쓰이게 되었을 것이다. 영어 패닉을 쓰는 것은 좋은 일인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영어 패닉을 쓰지 않으려면 어떤 말을 써야 할지 생각해 본다. ‘기절하다’라는 말은 ‘(사람이) 한동안 정신을 잃다’라는 뜻이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경우’를 가리키기도 한다. ‘초풍’은 ‘까무러칠 정도로 깜짝 놀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절초풍’은 정신을 잃고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매우 놀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절하거나 까무러칠 정도로 몹시 깜짝 놀라는 것을 기절초풍이라고 하니, 패닉, 멘붕과 비슷하지 않은가. ‘혼비백산’이라는 말도 혼백이 사방으로 흩어진다는 뜻으로, 매우 놀라거나 혼이 나서 넋을 잃은 상태를 이르는 말이므로 역시 패닉 또는 멘붕과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맛이 갔다’라는 표현도 ‘정신이 나갔다, 본래 행동에서 벗어나 미쳤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은 ‘기절, 초풍, 기절초풍, 공황, 공황상태, 혼비백산, 넋을 잃다, 얼이 빠지다, 맛이 갔다’라는 말보다 멘붕을 더 쉽고 편하게 쓴다. 그래서 이 말이 표준어가 되었을지, 아니면 언제쯤 표준어로 될지 궁금해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국립국어원에 “개그 프로그램 때문에 ‘멘붕’이 전국민이 다 아는 단어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표준어로 인정할 수 있을까? 만약 안 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물었다. 여기서 개그 프로그램은 개그콘서트의 ‘멘붕스쿨’을 가리킨다. 국립국어원이 답했다. “‘멘붕’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쓰이지 않은 단어로, 아직 표준성을 획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이 단어가 전국 대부분 지방에서 표준어와 같이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쓰인다면 표준어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원론적인 답변만 한 것이다.
이 문답이 오고간 시기가 2013년 4월이니, 지금쯤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하다. 국립국어원이 말하는 ‘오랜 시간 동안’이 얼마 동안을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멘붕’이라는 말이 처음 신조어, 유행어에서 지금처럼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게 대략 10년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지금쯤은 표준어로 인정해야 할지, 아직은 더 두고 보아야 할지 심각하게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오랜 옛날부터 멀쩡하게 잘 써 오던 말들이 있고, 또 비록 외국어이긴 하지만 꽤 오랫동안 써오던 패닉이라는 말도 있는데, 굳이 정체 불명의 멘붕을 표준어로 대접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표준어로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국립국어원이 말했듯이 ‘전국 대부분 지방에서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쓰이느냐’가 열쇠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멘붕이라는 말이 더 오랫동안 더 널리 쓰여 표준어로 되기 전에 이 말을 되도록 쓰지 말고 ‘기절, 초풍, 기절초풍, 공황, 공황상태, 혼비백산, 넋을 잃다, 얼이 빠지다, 맛이 갔다’와 같은 말을 상황에 맞게 살려 썼으면 한다. ‘맛이 갔다’는 표현은 좀 비속어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멘붕’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2016.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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