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가을날이다. 길거리에는 알록달록 형형색색 예쁜 옷으로 갈아입은 선남선녀들이 환하게 웃으며 활보한다. 내가 대학생 1학년이던 1986년 여대생들은 <콘사이스 영한사전>이나 <프레시맨 잉글리시>를 가슴에 껴안고 어깨엔 가방을 메고 다녔더랬다. 지금 여대생은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 커피잔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책가방을 들었는데, 가방 안에는 필시 노트북 컴퓨터가 들어 있을 것이다. 바지 뒷주머니엔 스마트폰이 꽂혀 있다. 아메리카노 커피잔 잡은 손에 눈길이 간다. 어떤 젊은이는 물병을 들었는데, 물이 들었는지 음료가 들었는지까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물병을 들고 다니면서 시시때때로 한 모금씩 들이켜는가 보다. 미세먼지 때문일까.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서 그런 것일까. 살갗을 아름답게 관리하는 한 방법일 수도 있겠지. 아무튼 손에 손에 물병 하나씩 들고 다니는 건 요즘 젊은이들의 유행이다. ‘나 같으면 소주를 한 병쯤 넣어 다닐 텐데’ 하는 생각도 문득 해본다. 그런데 이 물병을 가리키는 말이 무엇인지 듣고는 참 놀라웠다.
‘보틀’이라는 말을 쓴다. 보틀이라…. 영어다. ‘bottle’ 이렇게 쓴다. 실제 발음은 ‘바틀’에 가까운데 글자 모양이 [보틀]로 읽도록 생겨먹었다. 그럼 영어 보틀은 무슨 뜻일까. ‘병’이다. 동사로 쓰면 ‘병에 담다’라는 뜻이다. 우유, 술, 용기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보틀은 그냥 병이다.
‘음료를 시키면 보틀을 주는, 〇〇〇 카페’라는 게 있다. 이때 ‘음료를 시키면 음료를 담을 병도 주는’이라고 하면 딱 맞겠는데 굳이 보틀이라고들 쓴다. ‘가성비 뛰어난 휴대용 정수물병 '투웨이보틀' 출시’라는 언론보도 제목이 있는데, 이때 정수물병 이름을 ‘보틀’이라고 지었으니 참 이상하게 보인다. ‘한 손에 쏙 '미니워터보틀 3종' 선봬’라는 기사 제목도 눈에 띈다. ‘작은물병’이라고 하면 얼른 알아들을 것을 ‘미니워터보틀’이라고 한다. 영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보틀’을 아무 거리낌없이 잘 받아들이는가 보다. 나는 어렵다.
‘텀블러’라는 말도 돌아다닌다. 역시 영어다. ‘tumbler’ 이렇게 쓴다고 한다. ‘손잡이가 없고 밑바닥이 편평한 큰 잔’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다. 백과사전을 뒤져보니, “텀블러의 어원은 ‘굴러가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의 텀블(tumble)에서 온 말로 물·주스 등 음료를 마실 때 쓰인다. 한국에서 ‘텀블러’라 하면 손잡이가 없는 보온 머그잔을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 등 영어권 국가에서는 유리잔까지 포함한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다. 영어 ‘tumbler’의 원래 뜻은 무엇일까. 곡예사, 체조선수이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덤블링’이라는 것을 했는데, 지금 알고 보니 그게 이것인 듯하다.
보틀, 텀블러라고 말하는 물건은 그냥 병이다. 물을 넣으면 물병, 술을 넣으면 술병, 음료를 넣으면 음료병, 약을 넣으면 약병, 농약을 넣으면 농약병, 커피를 넣으면 커피병이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었으면 플라스틱병, 유리로 만들었으면 유리병, 나무로 만들었으면 나무병, 알루미늄으로 만들었으면 알루미늄병이다. 재료와 내용물을 한꺼번에 말하려면 ‘플라스틱 물병’이라고 하면 된다. ‘컵’이라고 해도 되겠다. 컵도 영어이긴 마찬가지이지만 이미 우리말 속에 녹아 있는 말을 활용하는 것이 새로운 말을 자꾸 가져다 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보틀, 텀블러라는 말도 한 세대쯤 지나면 지금의 컵처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겠지. 컵이라는 말이 싫으면 ‘잔’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럼 병과 컵, 잔은 어떻게 구분할까. 사전에서는 이렇게 구분한다. 병은 ‘주로 액체나 가루 등을 담는 아가리가 좁은 그릇’이다. ‘아가리가 좁은’ 그릇이다. 잔은 ‘마실 것을 따라 마시는 작은 그릇’이다. 특별한 특징은 없지만, ‘특히 술을 따라 마시는 작은 그릇을 이른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컵은 ‘음료를 담아 마실 수 있도록,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든 원통형의 잔’이라고 한다. 내가 구분한다면, 병은 뚜껑이 있는 물건을 가리키고 컵, 잔은 뚜껑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컵, 잔은 영어와 한자어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뚜껑이 있다고도 하기 어렵고 없다고도 하기 애매한 용기도 등장했다. 무엇이라고 부를지 모르겠다. 서양요릿집에 가면 커다란 유리병에 음료를 가득 넣어주는데 뚜껑은 거의 무용지물처럼 생겼다. ‘저그’라고 하는 것도 있고, ‘드링킹자’(drinking jar)라고 하는 것도 있다. ‘머그잔’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구분과 명칭이 점점 복잡해져 갈 뿐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이런 것이 혼란스럽지 않은가 보다. 저그(jug)는 물병이라는 말이고, 자(jar)는 병이라는 말이고, 머그잔(mug盞)은 손잡이가 있는 원통형 찻잔이다. 그러니까 그게 그것이다. 미세한 차이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자꾸 다른 이름을 붙인다. 그러면서 외국말을 가져다 쓴다.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텀블러를 ‘통컵’이라고 부르자고 했다. ‘통잔’이라고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통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견을 많은 사람이 제시하였던가 보다. 컵이 영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가 하면 이 말로는 텀블러의 모양이나 기능을 아우르지 못한다고 본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냥 물통으로 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다들 일리 있는 주장이다. 들고 다니는 잔이라고 하여 ‘들잔’이라고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제법 괜찮아 보인다.
물병, 물컵, 물잔, 물통이면 충분할 텐데 텀블러, 보틀, 머그, 저그, 드링킹자와 같은 말이 범람하니 혼란스럽다. 영어에 아주 익숙한 젊은이들 말고 이 말을 다 알아들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진에 나오는 물건들 이름을, 어떻게 구분하여 부르는지 다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컵’이나 ‘잔’으로 검색해 보면 이것저것 죄다 쏟아져 나온다. 모두 한 묶음으로 엮이는 집안이기 때문이다.
2016.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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