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시월드>라고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한다. 한번도 본 적 없고 관심조차 둔 적 없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언뜻 본 듯하기는 하다. ‘시월드’가 무슨 뜻일까 0.1초 정도 생각은 해봤다. ‘시’는 ‘바다’(sea)가 아닐까 싶었다. 잠수부, 해녀, 바다, 물고기, 횟집, 섬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닌가 잠시 생각했다. 순진했다. 해양 테마 놀이 공원을 가리키는 말은 ‘씨월드’라고 하니까.
“시월드는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처럼 ‘시(媤)’자가 들어가는 사람들의 세상 즉, ‘시댁’을 말하는 신조어로 스타들이 펼치는 고부갈등 등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가는 토크 프로그램이다.” <웰컴 투 시월드>를 방송한 ‘채널A’가 누리집에 올려놓은 설명글이다. 알고 보니 이 방송 프로그램은 2012년 9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2년 넘게 꽤 오랫동안 살아 있었다. 요즘도 가끔 재방송을 하는 것 같다.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의 집안 또는 시부모가 사는 집을 가리켜 ‘시집’이라고 한다. 집을 조금 높여 말하면 ‘시댁’이 된다. ‘시가’라고도 한다. 남녀가 결혼하여 가시버시가 되는 것을, 남자 쪽에서는 ‘장가든다’, ‘장가간다’고 하고 여자 쪽에서는 ‘시집간다’고 한다. ‘장가간다’는 말에서는 고려, 조선 초기의 모계중심사회가 연상되고, ‘시집간다’는 말에서는 조선 중후반의 부계중심사회가 떠오른다. 말 속에는 사회의 제도, 풍습, 문화, 역사가 담기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도 부계중심사회이다.
어머니의 처지에서 보면 자기 아들과 함께 살기로 하고 시집오는 며느리가 얼마나 예쁘고 귀하고 사랑스러울까. 자기를 대신하여 식솔들의 밥과 빨래를 맡아 해 줄 것이고, 대를 이을 손자 손녀를 낳아줄 것 아닌가. 며느리를 매개로 사돈이라는 새로운 친척도 만들어지고 양 집안이 연결된다. 얼마나 축복스런 일인가. 그런데 왜 시어머니는 며느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을까. 자기 아들을 뺏어간다고 여긴 것일까. 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아니한데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끔찍이 아낀다. 시어머니의 위치에 있는 여자는 자기 딸도 시집가면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될 것 아닌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오죽했으면 이런 속담이 생겼겠는가.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사위 사랑은 장모.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 고추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맵다. 굿 하고 싶어도 맏며느리 춤추는 꼴 보기 싫다. 딸네 사돈은 꽃방석에 앉히고 며느리 사돈은 바늘방석에 앉힌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 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 며느리가 미우면 손자까지 밉다. 며느리 자라 시어미 되니 시어미 티 더 낸다. 며느리 흉이 없으면 다리가 희다고 한다.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살다 보면 시어머니 죽을 날도 있다. 집안이 망하려면 맏며느리가 수염이 난다.
끔찍하지 아니한가. 이런 속담이 나오게 된 배경을 어림짐작해 보면, 그렇게 결혼들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손을 낳아 대를 이어온 게 기적같기만 하다. 요즘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면 아직도 고부갈등 타령이다. 물론 세상에는 고부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장모와 사위 간에도 좋기만 한 건 아닐 것이다. 장모와 사위 사이의 갈등을 ‘장서갈등’이라고 한단다. 사람 관계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인간이니까. 그런데 유독 고부 간의 갈등을 부각시키는 건 왜일까. 신문 사회면 사건들을 보면 고부간, 장서간 갈등은 서로 비슷한데도 말이다.
‘시월드’라는 말에서 힘들게 시집살이하는 며느리의 마음을 읽는다. 결혼을 하여 남편과 행복하게 잘 살고는 있지만,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주버니, 시누, 시동생 등은 그들만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와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밥을 먹고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동화되고 화합하고 즐겁게 웃으며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시월드’이다. 핵가족화의 영향일 것이다. 시월드란 시댁이라고 할 때 ‘시’(媤)와 ‘world’가 합하여 만들어진 말이지만, 시댁, 시집, 시가라는 말과는 어쩐지 엄청나게 다른 말 같다. 시집을 시월드라고 하면 처가를 ‘처월드’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처월드라는 말도 제법 널리 쓰이고 있다.
언론 기사를 몇 가지 찾아본다.
직장인 기혼남성 28% “처월드 산다” 기혼여성 41% “시월드 산다”
스트레스를 부르는 명절증후군, 시월드 vs 처월드
시월드, 처월드에서 배우자 사수하기
시월드보다 무서운 처월드 뛰어넘다
'시월드 시대는 갔다' 요즘에 처월드가 대세?
‘왕가네식구들’ 처월드로 시작해 시월드로 끝나나
시월드 대 처월드, ‘부양 갈등’ 가장 크다
시월드만 있나? ‘사랑과전쟁’ 시월드 뛰어넘는 잔혹 처월드
‘시댁, 시가’는 가까이 있는 이웃집 같은 느낌이 그나마 살아있는데, 그래서 내가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라는 생각도 듬 직한데, ‘시월드’는 아예 딴 나라에 있는 어떤 곳, 아니면 지구 바깥에 있는 어떤 곳이어서 감히 함께 어울리기 어렵다는 느낌을 준다. 처월드도 마찬가지다. 처갓집에서는 장모님이 씨암탉을 잡아주든지 아니면 통닭이라도 한 마리 시켜줄 듯한데, 처월드에서는 어쩐지 내가 이방인 취급을 받을 것만 같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가. 왜 이런 말을 만들어 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015년 10월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유기홍 의원이 국립국어원으로부터 지난 10년(2005~2014)간 신어(신조어) 등재 자료를 제출받았는데,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시월드에서 처월드가 유래되었고 시월드가 대중에게 더 익숙한 단어임에도 남성전용 단어인 처월드만이 신어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현재 국립국어원 ‘우리말샘’에는 시월드를 ‘시댁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올려 놓았는데, 처월드는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둘 다 올려져 있지 않다. ‘다음’의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시월드는 ‘시댁 혹은 시집살이를 나타내는 대한민국의 인터넷 신조어이다’라고 해놨고, 처월드는 오픈국어사전에 올려져 있는데, ‘시댁을 시월드라 칭하듯, 처갓집을 뜻하는 말’이라고 해놨다. 나는 시월드, 처월드 둘 다 싫다.
201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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