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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이번엔 ‘란파라치’란다

by 이우기, yiwoogi 2016. 10. 4.

파파라치’(paparazzi)(유명인을 쫓아다니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를 가리키는 이탈리아 말이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1920~1993)1960년 영화에 등장하는 사진가 Signor Paparazzo 때문에 널리 쓰이게 된 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라기보다는 남의 범죄 현장이나 법규 위반 현장 등을 사진으로 찍어 관계 당국에 고발함으로써 보상금을 벌어들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국내에서 파파라치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2001년 정부가 교통법규 위반 신고 포상금제도를 마련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정부는 교통법규 위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을 찍어 신고하면 신고자에게 포상금을 지급했다. 사진 찍기에 능하고 눈치 빠르며 별로 할 일 없는 이들에게 신종 부업(아르바이트) 거리를 제공해 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파파라치라는 말이 홀로 쓰이는 일은 별로 없고 다른 말과 덧붙여 새로운, 해괴한 낱말로 쓰이는 일이 훨씬 더 잦다. 말 갖다붙이는 실력이 가히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이고 그 기발함이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파파라치라는 말을 오래 전부터 쓰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 말이 한국에서 어떻게 새끼를 낳고 가지를 치는지 알면 아마 기절초풍을 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 끼리는 아주 쉽게 말하고 더 쉽게 이해하고들 있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여기저기서 파파라치의 변종 낱말들을 찾아본다.

표파라치, 대파라치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새로 만들어져 쓰인 말이다. 카파라치(차파라치), 네파라치, 신파라치, 팜파라치(약파라치), 폰파라치, 성파라치, 쓰파라치, 담파라치, 학파라치, 식파라치, 영파라치, 세파라치, 쇠파라치 따위가 있다. 대략 35개를 넘는다. 대부분 딱 들으면 무엇을 사진으로 찍어 고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는데 알쏭달쏭한 것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 갖다붙이기만 하면 말이 되고 뜻이 통하니 신통방통하기조차 하다. 이런 들을 말하고 들으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파파라치라는 말이 한창 유행할 때 국립국어원이 재미있는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국립국어원은 당시 쇠파라치를 대신할 우리말을 확정하기 위하여 누리꾼이 제안한 586건 가운데, 원래 의미를 잘 살리면서 우리말의 단어 구성에 맞는 듯한 쇠고기신고바치’, ‘허위소찰칵꾼’, ‘속임소몰래제보꾼’, ‘쇠고기발쇠꾼’, ‘불법소찰칵꾼등 다섯을 후보로 하여 투표를 벌였다. 그 결과 쇠고기신고바치40%의 지지를 얻어 쇠파라치의 다듬은 말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제법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 생각에는 쇠파라치를 버리고 쇠고기신고바치라고 말할 사람이나 언론은 거의 없을 듯하다. 나머지도 대중의 설득력을 얻기에는 뭔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냥 재미로 해본 놀이 같다.

 

국립국어원은 이 파파라치라는 말을 몰래제보꾼으로 순화하여 쓰라고 공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쇠파라치는 쇠고기 불법 유통 몰래제보꾼이라고 해야 하나, ‘쇠몰래제보꾼이라고 해야 하나. 란파라치는 김영란법 위반자 몰래제보꾼이라고 하야 하나. 어렵다. 몰래제보꾼 하나만으로는 마흔 개 가까이 되는 되는 파파라치들을 다 가리키기엔 한참 부족하고, 그렇다고 그들 파파라치 하나하나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쯤 되면 각종 파파라치에 통합 대응할 새로운 말을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솔직히 내 능력 밖이라서 할 말이 없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는 파파라치의 원래 뜻은 아예 잊어버리고 불법 사실을 캐내어 보상금을 타 내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거의 굳어져버렸다. 그러다 보니 이제 란파라치라는 말도 등장하게 되었다. ‘부정청탁 금지 및 금품 등의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약칭 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법)이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전국민의 일상을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이 법을 어기는 자를 골라내어 신고함으로써 보상금을 받아 먹으려는 무리들이 설치고 나선 것이다. ‘김영란법에서 을 파파라치에 갖다붙여 란파라치’(김영란법+파파라치)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이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

 

언론들은 란파라치의 등장 사실을 보도하면서, 란파라치 학원이 성업 중인데 007영화 찜쪄먹을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하다고들 한다. 또 어떤 언론은 란파라치를 피하기 위한 10계명을 일러준다. ‘택배로 온 선물은 반송하라. 직무 관련자의 기프티콘은 지체 없이 신고하라. 제자나 부하 직원에게는 한 잔도 얻어먹지 마라. 스승이나 직장상사직장동료에게는 물 한 잔도 사지 마라. 자기가 먹은 밥값은 각자 내라.’ 등이라고 하니, 앞으로 란파라치 피하는 일보다 인간관계 재정립하는 게 더 큰일이 되겠다.

 

한쪽에서는 또다른 논란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이 파파라치들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벌이는 논쟁이라고 할까. 한편에서는 포상금 사냥꾼이라는 말로 조금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딴 사람이 불가피하게 저지르는 교통위반 같은 것을 몰래 사진으로 찍어 신고하는 것이 정당하다거나 떳떳하다고 하기엔 뭔가 찜찜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한번이라도 걸려본 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공익 수호자라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주는가 보다. 어쨌든 이런 사람들 덕분에 모든 국민이 사소한 법이라도 더 잘 지키게 되지 않았느냐는 주장일 것이다. 일면 그럴듯해 보인다.

 

나는 파파라치라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다. 그들이 쫓는 대상이 유명인이든 어떤 범죄자이든 가벼운 법규 위반자이든 그것 자체가 사회의 부조리 현상을 드러내는 척도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유명인이라고 하여 사생활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야 할 까닭은 없다. 범죄와 법규 위반 같은 것은 아예 일어나지 말아야 하지만,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 그것은 경찰력 등 국가 공권력에 의하여 단속되고 처벌되어야 한다고 본다. 파파라치는 경찰력을 돕는 것이라고? 내가 보기엔 얍삽한 보상금 사냥꾼으로 보일 뿐이다.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는 1997년 프랑스에서 오토바이로 쫓아오는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다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당시 36살이었다. 이 사고는 전 세계인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온갖 파파라치가 판치는 우리나라에서는 이 파리떼 같은 파파라치의 감시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또다른 범죄나 또다른 법규 위반자들이 생겨나지 말라는 법이 없겠다. 무한대로, 제멋대로 생겨나는 각종 파파라치라는 말들도 파리떼처럼 우리말을 어지럽히고 있다. 하지만 마땅한 파리퇴치약은 보이지 않는다.

 

2016. 1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