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온통 뒤죽박죽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최고 권좌에 앉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한 탓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당선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그 곁을 수십 년 동안 지켜온 노회한 모사꾼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정치 모리배들이 나라를 결딴내고 있다. 이 년놈들은 청와대를 정점으로 한 정부기구들을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도구로 써먹었다. 정상적인 방법과 절차를 팽개친 채 제멋대로 정치와 행정을 갖고 놀았다. 그 결과 국민은 도탄에 빠졌다. 이 년놈들은 흠결이 잡힌 대기업들의 목을 졸라 천문학적인 돈을 뺏었다.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가신들은 깨춤을 추며 국민을 우롱하였다. 어딜 감히 ‘문화’라는 말을 그 더러운 입에 올렸더란 말인가. 구중궁궐 안에서 호가호위한 놈들은 물론이고 여당 정치꾼들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통령 근처에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고 큰 미쁨을 얻어 비서가 되고 낙점을 받아 고위공무원으로 행세한 자들이 지금 와서는 ‘선 긋기’를 하며 달아나고 있다.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되고 헌정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였는데도 누구 하나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하는 자가 없다. 이런 놈들을 믿고 국민 노릇을 해왔다는 게 기막힐 따름이다.
신문ㆍ방송 제목을 보니,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라고들 한다. ‘게이트’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사건, 사고에 붙이는 이름마저 외국것을 갖다 쓰는가. 게이트(gate)는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즉 범국가적ㆍ국민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정부 또는 정치 권력의 대형 비리, 부정부패 의혹 사건 등에 쓰는 말이라고 한다. 주로 파문을 일으킨 사람이나 장소, 사건의 핵심 단어 뒤에 접미사처럼 붙여 사용한다고도 한다.(다음백과)
대부분 잘 아는 바와 같이 ‘게이트’라는 말이 이러한 뜻으로 처음 쓰인 것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을 낙마시킨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Affair) 때이다. 1972년 6월 워터게이트 호텔에 있던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남자 5명이 체포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닉슨은 재선에 성공했으나 결국 물러나야 했다. 그러니까 ‘게이트’는 사건, 음모, 부정, 부패, 농단, 비리, 권력 등의 뜻과는 전혀 관련 없는 말이었다. 그냥 사건의 배경이 된 호텔의 이름이었을 뿐이다. 미국에서는 이 사건이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일어났으니 워터게이트 사건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우리나라에서 권력형 대형 부정 비리 사건 등을 가리킬 때 ‘게이트’를 붙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대충 기억나는 것을 적어보면, ‘성완종 게이트’, ‘영포 게이트’, ‘박연차 게이트’, ‘한보 게이트’ 같은 게 있다. 모두 정부 실세를 등에 업고 부정 비리를 저지른 사건 들의 이름이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 자주 듣던 말 가운데 ‘지퍼게이트’라는 좀 지저분한 게이트도 있었다. 미국에서 뭐라고 하건 그건 모르겠고, 우리나라에서 왜 권력의 부정 비리 사건을 ‘게이트’라고 하는가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미국 민주당 선거운동 본부가 있던 그 호텔 이름이 ‘워터마운틴’이었다면, 혹은 ‘워터윈도’였다면…. 우리는 성완종 마운틴, 영포 마운틴이라고 하거나, 박연차 윈도, 한보 윈도라고 불렀을 것인가. 웃긴다.
당장 언론 제목을 검색해 보면 이렇게들 쓴다. 더 찾아보면 ‘게이트’라는 말을 쓰지 않는 언론도 많을 것이다.
-"최순실게이트로 희망까지 잃어…극에 달한 2030 분노" (뉴스1)
-거세지는 국민 분노…'최순실 게이트' 규탄 서울 대규모 촛불집회 (아시아경제)
-오늘 서울 도심 곳곳 ‘최순실 게이트’ 비판 대규모 집회 (연합뉴스TV)
-'최순실 게이트' 안종범·정호성 비서관 등 핵심 대거 압수수색…청와대 포함 (세계일보)
-‘최순실 게이트’ 배후설 실체는? (데일리한국)
-"최순실 게이트 아닌 '최순실 비리+박근혜게이트'다" (오마이뉴스)
-'박근혜 게이트' 성난 시민들 "박근혜 대통령 하야하라" (한강타임즈)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는 워낙 칡넝쿨처럼 얽히고설켜 있어서 가닥을 찾기 어렵다. 아무리 텔레비전 뉴스를 열심히 보고 신문 기사를 두 눈 부릅뜨고 읽어도 사건의 흐름을 어떻게 읽어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대체로 너덧 가지 흐름이 있는 것 같다. 첫째, 대통령 연설문 등 각종 청와대 비밀문서가 불법으로 외부로 유출된 사건, 둘째, 여러 대기업을 상대로 공갈협박을 하여 강제로 돈을 뜯어낸 사건, 셋째, 최순실 딸의 고등학교 재학시절의 부정과 대학교 입학부정ㆍ학점과 관련한 사건, 넷째, 몇몇 놈들이 최순실 곁에서 각종 문화행사와 홍보 등의 사업을 기획ㆍ실행하면서 잇속을 챙겨 먹은 사건 등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 깊이있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이렇게 복잡다단한 난마처럼 뻗어 있는 사건을 한마디로 뭐라고 부를 것인가. ‘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러도 괜찮은가. ‘워터게이트 사건’처럼 최순실이 무슨 호텔도 아니고….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최순실 게이트’보다 말이 길지만 이보다 더 정확하게 이번 사건을 설명할 만한 말을 생각해내지 못하겠다. 최순실이라는 이름 다음에 한 사람의 이름을 더 넣고 싶은데, 그러면 너무 길어지니까, 아니 막걸리 먹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까 봐 그것은 좀 참겠다.
이번 사건을 다루는 신문의 지면을 ‘게이트’가 아니라 ‘국정농단’으로 붙이는 언론도 많다.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 “지지율 15% 미만, 사실상 대통령 직무수행 불가능” (서울신문)
-특종 보도로 본 최순실의 국정농단 (한국기자협회보)
-[최순실 국정농단] 검찰, 최순실 빌딩·전경련 사무실 압수수색 (부산일보)
농단(壟斷ㆍ隴斷)은 이익이나 권리를 교묘한 수단으로 독점한다는 뜻이란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고 물건을 사 모아 비싸게 팔아 상업상의 이익을 독점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하는데, <맹자>의 ‘공손추’(公孫丑)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최순실과 그를 둘러싼 모리배ㆍ협잡꾼들이 대통령ㆍ청와대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질렀으니 이를 가리켜 ‘농단’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들이 제멋대로 주무르고 갖고 논 게 명색 ‘국정’(國政)이었으니 ‘국정 농단’이라 할 수밖에 없겠다. ‘최순실 게이트’라고 하면 얼른 개념이 잡히지 않고 흐리멍덩해지고 자꾸 미궁에 빠져드는 것만 같은데,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라고 이름 붙이고 나니 어떤 놈이 무슨 짓을 해먹었는지 대번에 알 수 있게 된다. 사건의 크기가 실로 어마어마한 정도이니 ‘최순실 국정 농단 대사건’이라고 할까 싶기도 하다.
국립국어원의 누리집에 있는 ‘다듬은 말(순화어)’ 자료에는 ‘~ 게이트’를 ‘~ 의혹 사건’으로, ‘게이트사건’을 ‘(대형)비리 사건’으로 순화하자고 해 놓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게이트’가 올려져 있기는 한데, 지금 말하고 있는 ‘국정 농단 사건’이나 ‘(대형) 비리 사건’과는 관계 없는 ‘문’이라는 뜻으로만 올려져 있다. ‘최순실 게이트’라고 할 때 ‘게이트’는 우리말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에서나 ‘워터게이트 사건’, ‘지퍼 게이트’라고 하는 것이다. 대체로 ‘게이트’가 ‘의혹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이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의혹 사건’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이 드러난 확실한 범죄까지도 게이트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 아닐까.
2016. 10. 29.
사진은 <경향신문> 기사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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