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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컴퓨터’를 ‘슬기틀’이라고 하지 못할 까닭은 무엇인가

by 이우기, yiwoogi 2016. 9. 29.

굳이 구별하자면, ‘외국어다른 나라의 말이고, ‘외래어외국어가 한국어 속에 들어와서 우리말처럼 쓰이는 말이다. 외래어를 우리말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꼭 따지자면 우리말은 아니다. 외국어를 들온말, 전래어, 차용어라고도 하는가 보다. 우리말은 모국어, 고유어라고들 하는데 똑같은 말은 아니다.

 

외국어는 남의 나라 말이니 되도록이면 쓰지 말고 외래어는 거의 우리말과 같으니 써도 된다고 말한다. 대개 그렇게들 받아들인다. 외래어와 외국어는 어떻게 구별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자주 써야 우리말처럼 쓰인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아무나 구별하고 규정짓기 어려우니 국어사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에서 어떤 물건이나 제도가 처음 들어올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가리키는 우리말이 있는지 찾아보는 일이다. 그것을 가리키는 우리말이 없으면 그것과 비슷한말이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그래도 없으면 우리말을 이러저리 끼워 맞춰 새로운 말을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이때는 물건이나 제도의 모양, 성격, 쓰임새, 재료 같은 것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마저 뜻대로 안 되면 하는 수 없이 외국말을 그대로 갖고 올 수밖에 없겠다.

 

문제는, 물건이나 제도는 물밀 듯이 밀려드는데 그것을 가리키는 말을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고민하고 토론하고 결정하는 일은 더디다는 것이다. 낯선 말을 그대로 갖다 쓰면 외국어이고, 그것이 우리 말글살이에 잘 녹아들면 외래어가 되며,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외국어였는지 외래어였는지조차 잘 모르게 되면 그냥 우리말이 된다. 이런 과정을 인위적으로 막거나 늦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우리말 운동이라고 볼 수 있겠다.

 

컴퓨터라는 말을 우리는 언제부터 썼을까. 우리나라에서 컴퓨터를 최초로 이용한 것은 196610간이인구센서스IBM1401로 수행한 것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컴퓨터라는 말을 널리 썼는지는 모르겠다. 컴퓨터라는 말이 일반 대중들 속에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개인용 컴퓨터(PC)가 대중화한 1980~90년대 즈음이 아닐까.

 

그때 컴퓨터를 셈틀’, ‘슬기틀이라고 부르자는 운동이 일었다. 셈을 하는 틀(기계), 슬기로운 틀(기계)이라는 뜻이겠다. ‘계산기’, ‘전자계산기’, ‘전산기라고 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컴퓨터라는 말 대신에 슬기틀이라고 쓰는 사람은 아직 많다. 주로 우리말과 우리글에 관심과 애정이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 슬기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게 고맙다. 국립국어원은 컴퓨터를 전산기’, ‘셈틀로 순화하자고 제안한다. 내가 보기엔 컴퓨터가 가진 아주 많은 기능을 생각할 때 전산기, 셈틀은 어쩐지 부족해 보인다. 아무튼.

 

많은 사람이 말글살이에서 컴퓨터라고 하지 않고 슬기틀이라고 한다고 해서 슬기틀이라는 말을 표준어로 삼고 컴퓨터라는 말을 외국어로 강등시키고 쓰지 말자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닐 테지만 적지 않은 혼란이 일 것이다. 우리말 운동 하는 사람들이 아주 쓸 데 없는 짓을 하는 사람으로 매도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컴퓨터라는 외국어가 완전히 정착하기 전에 슬기틀이라는 말을 더 널리 쓰고 아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하자는 말이냐?”하는 주장이 있었다. 한때 우리말을 살려 써야 한다는 주장이 넓게 퍼지면서 비행기를 날틀, 이화여대를 배꽃계집큰배움터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주장이 있었는데, 크게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이때 자주 들린 말이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하자는 말이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비행기를 날아다니는 기계, 즉 날틀이라고 하지 못할 까닭은 무엇인가. 어색한가? 비행기가 가진 기능을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은가. 어차피 비행기(飛行機)라는 말도 날아다니는 기계라는 말 아닌가. 별것 있나.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하지 못한 것은, 괜스레 한자말이 있어 보이고 우리말은 좀 없어 보인다는 사대주의 때문은 아니었을까.

 

소프트웨어, 하드웨어라는 말도 무른모, 굳은모라는 말로 바꾸자고 한 적이 있다. 지금도 사전을 찾아보면 무른모는 컴퓨터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개발된 프로그램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프로그램은 풀그림으로 쓰자는 말이 있었다.) 굳은모는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마우스를 다람쥐라고 하자는 주장도 반짝 나왔다가 사라져갔다. 아무튼 슬기틀, 무른모, 굳은모와 같은 말은 한때 반짝반짝 빛나다가 스러져 가버렸다. 컴퓨터와 함께 따라 들어온 갖가지 말들을 제때 다 번역해 내지 못한 탓이고, 우리들이 너무 무관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 만든 말이 적절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지게차, 사다리차를 생각해 본다. 지게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써온 농기구이다. 어느날 외국에서 희한하게 생긴 물건이 들어왔는데 생긴 모양은 지게 같고, 쓰임새도 영락없이 지게다. 영어로는 포크리프트(forklift)라고 하는데 이런 어려운 말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냥 지게차이다. 사다리차도 마찬가지이다. 사다리는 아득한 옛날부터 있던 말인데, ‘에 붙어 다니니 사다리차가 되었다. 영어는 고급지고 우리말은 촌스럽다는 생각만 살짝 벗어던지면 뜻밖에 쉬워진다.

 

국립국어원 누리집으로 가본다. 컴퓨터는 전산기, 셈틀로 순화해 놓았다. 덩달아 퍼스널 컴퓨터(PC)개인용 전산기라고 하고, 컴퓨터 시스템은 전산 체계라고 하고, 컴퓨터 게임은 전산 놀이라고 하고, 컴퓨터 네트워크는 전산망이라고 하고, 슈퍼 컴퓨터는 초고속 전산기라고 하자고 제안해 놓고 있다. 노트북 컴퓨터는 책크기 전산기라 하고 데스크탑 컴퓨터는 탁상 전산기라고 부르잔다. 어떤가. 어떤 건 그런대로 괜찮고 어떤 건 어색하고 또 어떤 건 많이 이상할 것이다. 어색하고 많이 이상한 것은 왜 그럴까.

 

처음에는 어색해도 자주 쓰다 보면 익숙해지게 되고 익숙해지면 어색해지지 않게 된다. 면도기도 그렇고 자전거도 그렇고 컴퓨터도 그렇고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말도 그렇다. 인터넷을 누리망으로, 홈페이지를 누리집으로, 네티즌을 누리꾼으로 하자는 것도 그렇다. 이미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언어생활 속에 완전히 들어와버린 인터넷이라는 말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 두 사람이 쓰기 시작하면 유행이 되고 유행이 되면 쉽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 컴퓨터를 전산기, 셈틀, 슬기틀이라고 하지 못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들어온 말인 컴퓨터가 안방마님 노릇을 하고 전산기, 셈틀, 슬기틀이라는 말이 하인 취급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해보는 주장이다.

 

2016. 9.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