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청탁 금지 및 금품등의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약칭 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법)이 9월 28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법률과 관련하여 참 말이 많다. 법률을 만들 때부터 논란이 많았던 것이다. 어제 오늘 언론 보도를 보면 이 법률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정착하려면 좀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 법률로 인하여 피해를 보는 분도 있을 것이고 이득을 보는 분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법률 덕분에 우리 사회가 앞으로 아주 많이 맑고 깨끗해지리라 하는 것이다. 그런 기대를 갖는 분이 많다. 나도 그렇다.
앞으로 밥 먹을 때마다 생각을 잘 해야 한다.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사람과 밥을 먹어도 되나. 이 사람과 밥을 먹을 때 밥값을 누가 내야 하나. 이 사람과 밥을 먹더라도 무엇을(얼마짜리를) 먹어야 하나. 이 사람이 나와 밥 먹자고 하는 것을 신고해야 하나. 이 사람이 술 마시자고 하면 어떡해야 하나. 이 사람과 밥이나 술을 먹으면 각자 자기 몫을 내자고 해야 하나. 이 사람과 무엇을 어떻게 할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야 하고 판단을 해야 한다. 잘 모르는 것은 물어봐야 한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신고해야 한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졸지에 법을 어긴 나쁜 놈으로 몰리게 된다. 이 법을 어기게 되면 다른 범법자보다 더 큰 비난을 받을 공산이 크다. 도덕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우리 생활에 완전히 정착하기까지는 좀 비인간적이다, 좀 매몰차다, 좀 짜다, 좀 너무한다, 좀 계산적이다는 소리를 제법 듣게 생겼다. 그래도 나는 이 법을 정말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많이 늦었다고 생각한다.
9월 29일 오늘 <경향신문>을 보다가, ‘‘더치페이’ 용어 ‘각자 내기’로 표기합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경향신문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보도와 관련해 ‘더치페이’를 ‘각자 내기’로 표기합니다. 김영란법 시행을 맞아 ‘밥을 먹은 뒤 밥값을 각자 낸다’는 뜻으로 ‘더치페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국립국어원은 ‘더치페이’의 원래 뜻(비용을 각자 부담하는 일)이 이와 다른 만큼 우리말인 ‘각자 내기’ 사용을 권고하고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사전에서는 더치페이(Dutch pay)를 ①비용을 각자 부담하는 일 ②식사 따위의 비용을 각자 부담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에 따르면 더치페이라고 해도 될 듯한데, 더 정확하고 엄밀하게 따지면 뭔가 다른가 보다. 방송 뉴스의 한 부분을 옮겨 본다. “국내 교과서나 뉴스 기사 등의 오역 사례를 정리한 책 <오역의 제국-그 거짓과 왜곡의 세계>에 따르면 ‘더치’는 과거 영국이 식민지쟁탈 시기 경쟁자였던 네덜란드인을 지칭할 때 쓰던 경멸조의 단어이다. ‘네덜란드식 대접(Dutch treat)’이란 단어도 형편 없는 네덜란드인들이 대접을 한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자기 먹은 것을 자기가 값을 치러야 하는 대접 아닌 대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SBS 뉴스)
좀더 알아본다. “더치 페이(Dutch pay)는 더치 트리트(Dutch treat)라는 네덜란드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더치(Dutch)는 네덜란드인을, 트리트(treat)는 한턱내다, 대접하다라는 뜻으로 더치 트리트는 한국어로 표현하면 ‘대접’이라고 할 수 있다.”(위키백과) 이러한 문화가 네덜란드에만 있으란 법이 있겠나.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비싼 음식을 사먹기 위하여 미리 돈을 모으거나 먹고 난 뒤에 각자 자기 몫만큼 낸 일이 더러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뭐라고 했을까. ‘추렴’(出斂) 또는 ‘갹출’(醵出)이라는 말은 2명 이상의 단체가 모여 어떤 재화나 서비스에 대해 돈을 계산할 때, 한 사람이 한꺼번에 계산하지 않고 각 개인이 취한 부분에 대하여 돈을 따로 치르는 계산 방식을 뜻한다. 일본어에서 온 속어로 ‘뿜빠이’(일본어: 分配)라는 표현도 있다.(위키백과)
국립국어원이 2010년 7월 23일 발표한 보도자료를 한번 본다. “이번에 말터 누리집에서는 ‘더치페이(Dutch pay)’를 갈음할 우리말을 공모하였고 누리꾼이 제안한 ‘나눠내기’, ‘각자내기’, ‘각자부담’, ‘추렴’, ‘노느매기’를 후보로 하여 1776명의 참여 아래 투표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각자내기’가 940명(52%)의 지지를 얻어 ‘더치페이’를 갈음할 다듬은 우리말로 결정되었다. 앞으로 “더치페이 하자” 대신에 “각자 내자” 혹은 “각자내기 하자”가 널리 사용되길 기대한다.” 이런 것을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 좀 의아하긴 하지만 결과는 마음에 든다.
어제오늘 신문 기사 제목을 몇 개 찾아본다.
-국민 50.7% “김영란법으로 ‘더치페이 문화’ 확산될 것”
-‘김영란法’에 ‘영란이앱’ 등장…더치페이 앱도 ‘인기’
-더치페이 하거나 구내식당으로… 줄세운 ‘김영란法’
-청탁금지법 시행 첫날, 너도나도 ‘더치페이 합창’
-외신기자회견도 ‘더치페이’…국회의장도, 기자도 각자 계산
-‘더치페이’는 국적불명의 외래어…“‘나눠내기’ 사용하자”
대강 이러하다. 더치페이를 ‘나눠 내기’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다. 좋다. ‘각자 내기’라고 하든, ‘나눠내기’라고 하든 다 좋다. ‘추렴’, ‘갹출’이라는 말은 한자어로서 요즘 거의 쓰지 않는 말이자만 되살려 써도 좋을 듯하다.(나는 갹출이라는 말을 비교적 자주 쓰는 편이다. 말맛이 좋고 재미있어서이다. ‘갹’이라는 발음을 하는 게 일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싶어서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본다. 저녁에 한잔할 일이 있으면 되도록 회비를 걷는 편이다. 2만 원이면 적당하다. 돈이 모자라면 누군가 조금만 더 부담하면 된다.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떤 때는, 회비를 갹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이런저런 까닭을 이야기하며 혼자 밥값ㆍ술값을 다 내기도 한다. 무슨 상을 받았다거나 생일이라거나 하는 게 핑계의 대부분이다. 미풍양속이라고 생각해 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관계가 없고, 갑을관계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것마저 뜯어말려야 하게 생겼다.
2016.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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