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용어순화편람
머리말
정부에서는 쉽고 간결하며 올바른 우리말을 모든 행정업무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81년도부터 순화해야 할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 등을 수집하여 고쳐 나가는 작업을 추진하여 왔습니다.
각급 행정기관에서 법령을 제정하거나 문서를 작성할 때는 간결하면서도 부드럽고 뜻이 쉽게 전달될 수 있는 우리말을 사용함으로써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함에도 우리의 역사적 배경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로 사용되는 용어는 어려운 한자말이나 일제 잔재 용어, 무분별한 외래어 및 권위주의적 용어가 많아서 일반국민이 불편과 불쾌감을 느껴왔으며, 이러한 현상은 행정용어 순화작업이 추진된 이후에도 크게 개선되지 못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보다 더 체계적으로 행정용어 순화작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91년 말에 『행정용어바르게쓰기에관한규정』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금년도에 총무처와 법제처 그리고 문화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행정용어 순화작업을 벌여 어문관련단체 등 70여 개 기관으로부터 순화대상용어를 수집하여 국어심의회 등 전문기관의 심의를 거친 8673개 용어를 1차 최종 확정하여 이번에 『행정용어순화편람』을 발간하게 된 것입니다.
바꿈말 중에는 다소 쓰기에 어색한 말도 있고 그동안 몸에 밴 용어를 갑자기 바꾸어 쓰기가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공무원 여러분이 우리말을 아낀다는 마음으로 활용해 나가면 점차 익숙해지리라 믿습니다. 이 편람이 공무원 여러분의 업무 추진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더 나아가 자주정신을 높이고 우리의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공직풍토를 조성하는 데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92. 12.
총무처장관 이 문 석
책꽂이에서 발견한 보물이다. 이 머리말에 따르면 무려 1981년부터 행정용어를 순화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으며 11년 뒤인 1992년에 이 편람을 발간했다는 것이다. (나는 1992년 7월에 지방신문사 교열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10년 넘은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된 편람을 공무원들이 행정업무 전반에서 얼마나 활용했을까 궁금해진다. 8673개 용어를 모두 익히고 외워서 모두들 다 잘 사용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그래도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특히 공직사회에서 어려운 한자말, 일제 잔재 용어, 무분별한 외래어, 권위주의적 용어를 걸러내는 데 적잖이 기여했으리라고 본다. 1992년부터 몇 해 동안은 공무원 시험이나 교육 같은 데서 이 편람을 활용한 문제와 강좌가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해 본다.
이때 정부에서는 8673개 용어 가운데 어떤 것은 순화한 말만 쓰도록 하고, 어떤 것은 이미 쓰던 말과 병행하여 쓰도록 하고, 어떤 것은 순화한 말을 권장하고 있다. 그만큼 행정용어 부문에서 쉽고 간결하고 부드러운 우리말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나 불편함이 없도록 합리적으로 유도하고자 한 것이다. 가령 ‘기부채납(寄附採納)’은 ‘기부받음, 기부받기’로 바꾼 말만 사용하도록 했다. ‘기(旣)’는 ‘이미’로 바꾸어 써야 한다. ‘수포(水疱)’는 ‘물집’으로 쓰기를 권장하고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으로 바꿔 쓰기를 권장하고 있다. 병행사용을 허용한 것에는 ‘전입(轉入)하다’=‘옮겨오다’, ‘추적(追跡)하다’=‘뒤쫓다’ 등이 있다.
하지만 요즘 쓰거나 보는 행정용어들은 1992년에 펴낸 편람의 기준에 많이 못 미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나하나 드러내 놓고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나 또한 날마다 수많은 용어를 쓰면서도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이렇게 표현하면 모두 알아들을 수 있을지, 아니면 정말 쓰지 말아야 할 용어를 마구잡이로 쓰고 있는 건 아닌지’ 늘 의문스럽다. 의문이 강하게 드는 것은 사전을 찾아본다. 한국교열기자회에서 펴낸 신문방송용어순화자료집 같은 것도 곁에 두고 찾아본다. 그러나 대충 대강 넘어가는 일이 더 잦다. 틀린 줄도 모르기 때문이고 바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어 알파벳이나 한자를 본문 속에 그대로 두고 보도자료를 내보내기도 한다. ‘내가 아니까 다 알겠지, 나도 모르겠는데 뭐 어쩌라구’ 이런 심보가 가득한 탓이다.
행정용어랄 것도 없다. 이 8673개 낱말은 그대로 우리 모두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거나 접하는 말이다. 시대가 흘러 지금은 거의 사라진 말들도 제법 있지만 대부분 공직사회에서든 일반 사회에서든 누구나 어디에서나 자주 쓰는 말이다. 이 편람에 따르면 ‘브로슈어(brochure)’는 프랑스 말인데 ‘안내서’로 바꿔야 한다. ‘타이틀(title)’은 ‘제목 또는 표제’로 바꿔야 한다. ‘키(key)’는 ‘열쇠’로 바꿔야 한다. ‘폴더(folder)’는 ‘서류(보관)묶음’으로 바꿔야 한다. ‘스킨로션(skin lotion)’은 ‘피부화장수’로 바꿔야 한다. ‘스티커(sticker)’는 ‘상표, (선전)광고(딱지), 교통위반 딱지’로 바꿔야 한다. 우리는 실제 바꿔 쓰고 있는가. 바꿔 쓰자니 너무 어색하다고 할 것도 있을 것이고, 굳이 바꿔 써야 할 까닭을 모르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글로벌 시대에 웬 케케묵은 소리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 10년 이상의 긴 기간 동안 노력하여 펴낸, 내가 보기엔 ‘기념비적인’ 이 편람이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싶다. 1992년 이후에도 편람을 고치고 더하고 깁고 하여 수정본을 펴낸 것으로 안다. 그렇지만 그 편람을 읽으면서 용어 하나라도 신경을 쓰는 공무원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싶다. 당시엔 편람을 각 기관마다 나누어주어 열심히 공부하고 공문서 작성에 참고하라고 했겠지만, 그 지시와 명령들은 과연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싶다. 무관심과 무신경이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았을 것 아닌가.
공무원 시험을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국어 시험도 보고 역사 시험도 보겠지. 요즘은 영어도 필수 아닐까. 그렇다면 이 <행정용어순화편람>에 기록되어 있는 용어도 시험 문제에 넣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이미 국어 과목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와 관련한 문제를 더 많이 내거나,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도 이 시험을 보게 하자고 하면 다들 기겁하겠지. 공문서나 각종 알림글 등 공무원들이 국민을 상대로 사용하는 용어에서만이라도 쉽고 간결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한다면 사회 전체적으로 얼마나 달라질까 싶은 마음에 해 본 생각이다. 그럴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2016.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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