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주장, 하소연, 분노, 구호, 표어, 광고가 넘친다. 이익단체가 난무하고 님비족과 핌피족도 쌨다. 님비는 ‘NIMBY’(Not In My Backyard)라고 쓰는데, 공해를 일으키거나 위험해 보이는 사회 시설물에 대하여 그 필요성은 인정하되 내가 살고 있는 데에서만은 안 된다고 하는 자기중심적 태도나 경향이다. 핌피는 ‘PIMFY’(Please In My Front Yard)라고 쓰는데, 님비와는 반대로 주로 이익이 되는 시설을 자신의 지역에 끌어오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말도 안 되는 정책을 펴는 대통령이나 중앙정부 관료들 또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을 비판하고 성토하는 일도 잦아졌고 심지어 그 직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주민소환도 이루어진다.
플래카드가 거리마다 골목마다 넘쳐난다. 제법 그럴듯하게 잘 만든 플래카드도 있고 괴발개발 써서 만든 조악한 것도 있다. 각종 주장을 담은 것도 있고 누구를 성토하는 것도 있다. 제발 이 플래카드를 눈여겨보아 주십사 하는 뜻이 담겼다. 자기가 주장하는 것만 옳고 나머지는 다 그르다는 심보가 보이기도 한다. 선거철이 되면 가히 플래카드의 끝판을 보게 된다. 출마하는 후보마다 수십, 수백 개의 플래카드를 내건다. 장삼이사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플래카드이다. 모양이야 거기서 거기이지만 크지 않은 플래카드 안에 마치 예술이기라도 한 양 다양한 빛깔의 글씨와 그림이 등장한다.
대학생 때 우리는 플래카드를 거의 직접 만들었다. 흰색 천을 사서는 페인트로 글을 썼다. 양 끝에 나무작대기를 연결하고 가느다란 철사를 이으면 끝이다. 대학 캠퍼스 곳곳에 ‘독재타도’, ‘민주주의 쟁취’, ‘직선제 개헌’ 같은 구호가 커다란 물결을 이루었다. 요즘은 학생들도 돈을 들여 깨끗하고 깔끔한 플래카드를 내건다. 손으로 직접 만든 플래카드는 한 해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할 정도이다. 그만큼 사회가 변하였다는 뜻이다. 그만큼 우리 눈높이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플래카드는 영어로는 이렇게 쓴다. ‘placard’. 사전에 적힌 뜻은 ‘구호와 광고 문구 따위를 적어서 양쪽 끝을 장대에 매어 높이 들거나 달아맨 기다란 천’이다. 영어 철자를 보여주는 것은 까닭이 있다. 어떤 사람은 플래카드를 ‘플랜카드’ 또는 ‘플랭카드’ 또는 ‘플랑카드’ 또는 ‘프랜카드’라고 쓴다. 영어 철자를 보면 ‘랜’, ‘랭’, ‘랑’이라고 쓸 까닭이 없음을 알겠다. ‘프’가 아니라 ‘플’인 것도 눈치껏 알겠다. 대학생이던 우리는 네 글자를 다 말하기 귀찮아서 ‘플랑’이라고 줄여 말하고는 했다.
플래카드라는 말을 온 국민이 다 알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대학 졸업하고 난 뒤 신문사 교열부 기자로 있을 즈음이었는데, 당시 ‘진주 우리말 우리글 살리는 모임’ 일을 하던 나는 플래카드를 ‘현수막’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대부분 내 말에 동의해 주었다. 논리적이지는 않았지만 필요없이 외래어를 쓸 까닭이 있겠느냐는 것과, 많은 사람이 혼동하고 있으니 아예 쉬운 우리말로 쓰면 좋겠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두 가지 이유를 대며 반대했다. 하나는 플래카드는 가로로 거는 것이고 현수막은 세로로 거는 것이기 때문에 그 둘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한자 현(懸)은 ‘매달다, 매달리다, 걸다’라는 뜻이다. ‘세로’라는 느낌이 더 강한 것은 왜일까. 다른 하나는 현수막(懸垂幕) 또한 결국 우리말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어려운 중국글자말을 굳이 쓸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지금은 플래카드를 쓰지 말고 현수막이라고 하자고 하면 대부분 쉽게 받아들이는 눈치이다. 구호나 광고 문구를 적어서 가로로 펼쳐 걸어놓았든, 세로로 늘어뜨려 놓았든 그것이 갖는 기능, 용도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막이 비록 중국글자말이긴 하지만 플래카드보다는 더 대중적인 듯하다. 대중적이라는 말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연세 많으신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이 더 잘 알아들을 듯하다는 말이다. 현수막에 세로 느낌이 강하여 가로로 내거는 것을 따로 '펼침막'이라고 하자는 주장도 많다. 실제로 많이 쓰고 있다.
이에 대하여 국립국어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수막의 형태와 관계없이, 긴 천에 표어 따위를 적어 양쪽을 장대에 매어 높이 들거나 길 위에 달아 놓은 표지물을 이르는 외래어 ‘플래카드(placard)’는 ‘현수막(懸垂幕)’으로 순화하여 쓰도록 하고 있다. ‘순화 정도’ 면에서는 ‘될 수 있으면 순화한 용어를 쓸 것’이라고 정하고 있기 때문에 ‘플래카드’라는 말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순화된 말이 있으므로 순화어 ‘현수막’으로 쓸 것을 권한다.” 그래놓고 순화한 말을 모아 둔 곳에는 '펼침막' 또는 '현수막'으로 바꾸자고 해 놓았다. 반드시 현수막으로 고치라고는 하지 않지만 되도록 플래카드보다는 현수막으로 쓰라는 것이다. 순화 정도로 보면 국립국어원의 말이 백 번 맞는 말이겠지만, 플래카드라고 쓰려는 사람들이 자꾸 플랭카드, 플랜카드, 플랑카드, 프랜카드로 잘못들 쓰고 있으니 이참에 아예 현수막, 펼침막으로 바꿔 쓰자고 하면 어떤가 싶다.
말이 나온 김에 ‘피켓’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어떤 주장을 펼치려는 시위꾼이 아주 많은 경우에 현수막과 함께 꼭 피켓이 등장한다. 주장하는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고 많은 경우에도 피켓에다가 하나하나 정리하여 적어 들고 시위를 한다. 피켓(picket)은 ‘주로 시위할 때, 어떤 주장을 적어 들고 다니는 자루 달린 널빤지’를 가리킨다. 자루가 달렸는지, 널빤지인지는 굳이 중요하지 않다. 쉽게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피켓의 장점은 똑같은 주장을 수백, 수천, 수만 개를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과 각각 다른 내용으로도 또한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색깔도 제각각 만들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피켓을 ‘손팻말’로 순화하자는 주장이 아주 많다. 팻말이 ‘남에게 어떤 내용을 알릴 목적으로 글씨를 쓰거나 표시를 해 놓은 말뚝’이니까 이 말뚝을 쑥 뽑아서 손에 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쉽다. 많은 사람이 손팻말이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쓰고 있다. 신문, 방송에서도 아주 자주 쓴다.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게 널리 쓰이고 있다. 그렇다고 피켓이 완전 사라진 건 아니다. ‘손팻말’은 아직 국어사전에 표제어로는 올라 있지는 않다. 멀지 않아 당당하게 표준어로 대접받을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이에 대하여서는 국립국어원의 게으름을 탓하고 싶다. 나는 그냥 ‘팻말’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의ㆍ주장은 주로 신문이나 방송의 뉴스ㆍ토론에서 이루어지고 공청회ㆍ설명회ㆍ토론회 같은 행사장에서 표출되고 걸러진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알아주기 전에, 공청회ㆍ설명회ㆍ토론회를 미처 열기 전에는 어떻게 할까. 어떤 정책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았다고(보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어떤 정책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한다. 광장에 모여 한목소리로 외치기도 한다. 이때 필수품이 현수막과 손팻말이다. 수많은 논리와 주장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하여 잘 만든 현수막과 손팻말은 수만 군중이 외치는 목소리보다 울림이 클 수도 있다. 구호와 함성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지만 현수막과 손팻말은 사진기에 담겨 영원히 남게 된다.
주의ㆍ주장이 넘쳐나고 거리마다 현수막과 손팻말이 넘실거리는 우리 사회는 과연 선진국인가, 민주주의 국가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선진국인지에 대하여서는 자신이 없지만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맞는 것 같다.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정부가 하려는 어떤 정책에 대하여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대놓고 반대한다고 주장한 적이 었었던가 생각해 보라. 만약 그 시절에 그랬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 죽었을 것이다. 실제 그런 일은 자주 발생했다. 그런 시대에 견주자면 분명 민주주의 국가가 맞긴 하다. 그렇지만, 정말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느냐 다시 묻는다면, 나는 주저주저 대답하지 못하겠다.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죽는 일이야 있겠는가마는 물대포를 맞게 되거나 신상정보를 털려 애매모호하고 억울하게 골로 보내질 수도 있는 시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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