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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조율이시, 홍동백서, 어동육서

by 이우기, yiwoogi 2016. 9. 15.

추석 차례상을 차린다. 먼저 큰집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차례상을 차리고 본가로 돌아와 선친의 차례상을 본다. 큰아버지, 큰어머니 계시고 사촌형님도 계시고 친형님들도 계신데 어찌 된 게 10여 년 전부터 차례상 진설(陳設)은 내 몫이 되어 있다. 제사 때도 마찬가지다. 며느리들이 부엌에서 이런저런 제물들을 제기에 올려 놓기만 하면 나는 그것을 들고 제상이 놓여 있는 큰방을 들락날락한다. 오늘은 조카들을 제법 부려먹었다.

 

보통 땐 조카들은 저쪽 방에서 놀고 형님들은 마루에서 논다. 논다기보다는 밤을 깎거나 집안일을 의논하거나 서로 안부를 묻는다고 해야겠지. 모든 것은 조화롭다.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안부를 물어야 하며 또 나이 많은 분들은 집안일을 의논해야 하므로. 아무튼 나는 바쁘다.

 

어릴 때부터 들어 온 풍월(風月)이 없지 않아 그래도 꾸지람 들을 만큼 헤매지는 않는다. 가령 큰집에서 제상에 제물을 진설해 놓으면 큰어머니께서 마지막 검사를 하는데 한두 개 정도 자리를 옮기는 것 말고는 거의 합격 점수를 받는다. 요즘은 맡겨 놓고 간섭조차 하지 않는다. 거기서 슬픔을 조금 느낀다. 완전 미더워서라기보다는 다른 어떤 것이 느껴져서이다. 그래서 더 부담스럽기도 하다.

 

내가 아는 것은 조율이시(棗栗梨柿), 홍동백서(紅東白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뿐이다. 이 정도라도 많이 아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제상의 맨 앞줄 맨 왼쪽부터 대추, , , 감을 놓는다. 조율이시 순서다. 이것들은 모두 홀수로 놓아야 한다. 아니, 모든 제물은 홀수여야 한다. 이 네 가지는 제상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되고 순서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다음 홍동백서이다. 빨간 것은 동쪽, 하얀 것은 서쪽이다. 집 방향이 어느 쪽인가를 떠나서 무조건 오른쪽이 동쪽이고 왼쪽이 서쪽이다. 사과는 오른쪽이고 배는 왼쪽이다. 대략 그렇다. 좌포우혜는 육포는 왼쪽에, 식혜는 오른쪽에 차리라는 뜻이다. 어동육서는 물고기 종류는 동쪽 즉 오른쪽에, 육고기 종류는 서쪽 즉 왼쪽에 놓으라는 뜻이다. 두동미서는 물고기의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꼬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놓으라는 뜻이다. 나는 이 다섯 가지만 잘 지키면 나머지는 크게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들은 풍월에 이런 것도 있으니 무시하지 못한다. 제상에 제물을 놓았을 때 그 줄이 홀수여야 한다. 과일, 나물, , 간장, 밥과 국 대강 이렇다. 수박은 겉은 초록인데 안은 빨간색이다. 그렇지만 맨오른쪽 맨앞줄에 놓는다. 다른 과일보다 크기 때문에 위치가 애매한 탓이다. 바나나, 파인애플 같은 외국 과일류는 잘 놓지 않는데, 요즘은 그런 것이 무시된다. 고인이 살아 생전 좋아했던 것이거나 진귀한 것이어서 한번 꼭 드시도록 권하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 양주를 제주(祭酒)로 쓰고 망고나 키위 같은 과일도 올린다. 고춧가루, 마늘 양념은 쓰지 않는다. 따라서 김치는 제상에서 볼 수 없다. 털이 있는 과일인 복숭아도 제상 근처에 기웃거리지 못한다. 생선 중에는 삼치, 갈치, 꽁치는 쓰지 않는다. 까닭이 없지는 않을 텐데,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는데 자꾸 하다 보니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제상 앞에 얼씬거리기를 20년 넘게 하다 보니 그리 된 듯하다. 요즘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남의 제상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제상에 제물을 늘여놓는 방법에는 정답이 없다. 지역마다 다르고 집안마다 다르다. 내가 옳다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다. 옳은 말이다. 남부지방에서는 감, , 대추, 배가 이미 풍년이라고 하더라도 중부지방이나 북부지방에서는 이게 없을 수도 있다. 생감을 쓸 수도 있고 곶감을 쓸 수도 있다. 차례를 지낸 뒤 음식을 하나하나 내려서 나눠먹을 수도 있고 그대로 차례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해도 된다. 음복을 해도 되고 안해도 되고 긴 시간 동안 해도 된다.

 

<한국일보> 201697일자 24면에 어동육서, 조율이시이거 도대체 누가 만든 규칙이야?’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내용인 즉슨, 옛 문헌 어디에도 이런 근거가 없으며 1960년대 이후에 집안별로 부를 과시하는 문화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주장이었다. 집집마다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적절히 예를 갖추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이다. 듣고 보면 맞는 말이다. 제상에 올릴 것이라고는 정성과 사랑, , 효도, 그리움, 존경 그밖에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조금 더 생각한다. ‘조율이시, 홍동백서, 좌포우혜, 어동육서, 두동미서이런 기준이라도 있으니 해마다 차리는 차례상, 제상이 일정한 모양을 갖추게 된다. 어느 해에는 생선이 왼쪽에 있다가 어느 해엔 오른쪽으로 가고, 나물이 가운데 있다가 뒤로 갔다가 하는 일은 적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맨앞줄 과일들도 자기들끼리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지 않는다. 형제들도 며느리들도 조카들도 이건 왜 여기 있어요?”라고 물으면 대답해 줄 근거가 마련되어 있어서 퍽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옛 문헌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안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기준을 정해 놓고 수십년 동안 지켜오고 있으니, 어렵더라도 참 쉽고 편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근거가 없더라도 우리 집안에서 우리 윗 세대와 우리 세대가 수십년 동안 옳은 줄 알고 그렇게 써왔으니 이게 우리 집안의 기준이고 예법이다라고 말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이 기준을 어기거나 바꾸고 싶은 마음이 아직은 없다.

 

2016. 9. 15.


사진은 인터넷 여기저기서 가져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