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ㆍ후반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이른바 ‘사구체 논쟁’이라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국문학과를 다니던 나는 처음엔 ‘사구체’를 신라시대의 향가의 한 종류라고 인식했다. 넉 줄로 된 사구체(四句體), 여덟 줄로 된 팔구체, 열 줄로 된 십구체 같은 것을 고등학교 때부터 배웠으니까. 의과대학을 다닌 친구들은 ‘사구체신염’을 먼저 떠올렸을까. 하지만 이 ‘사구체’는 ‘사회구성체’라는 말의 준말이다. 긴 말을 간단하게 줄여서 말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사회구성체’라는 말의 뜻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당시의 우리 사회를 신식민지로 볼 것이냐, 봉건사회로 볼 것이냐, 자본주의로 볼 것이냐, 국가독점 자본주의로 볼 것이냐 따위로 제법 시끄럽게 논쟁하던 때가 있었다.
문학에서도 민족문학, 민중문학, 시민문학, 세계문학, 지식인문학, 리얼리즘 따위의 개념을 쪼개고 붙이고 나누고 합하면서 제법 시끌벅적하게 논쟁을 벌였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같은 계간지를 필두로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을 퍼뜨리려는 평론가들이 여기저기 문예지에 긴 논문을 게재하곤 했다. 제목도 길었다. 문장도 정말 길었다. 읽어낼 재간도 없었을 뿐더러 읽는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일일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때 읽던 글은 대부분 딱딱했다. 논쟁을 하는 글이니 딱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론, 본론, 결론 같은 말은 기본적으로 접하는 말이었고, 배경, 근거, 연구, 논점, 경향, 현황, 현단계, 상황, 고찰, 분석, 관계, 효과, 구조, 발전, 현실, 현재, 미래, 과제, 대안, 전망, 주장 같은 말을 아주 자주 만나게 되었다. 각각의 낱말은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다(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렵고 무서운 말들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어들이 안고 있는 길고 복잡한 주장들은 뇌속 해마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려웠다.
가장 많이 보고 들은 개념어는 ‘현황과 전망’이었던 것 같다. <현황과 전망>이라는 이름의 잡지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사회의 현재, 우리 노동의 현실, 우리 문학계의 현실, 국제관계의 현황 같은 것을 죽 나열한 뒤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또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또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다. 몇 쪽짜리 보고서에서부터 거의 100여 쪽에 이르는 장편 논문에 이르기까지 참 많이 읽고 토론하였다. 책 제목도 ‘현황과 전망’이 득세했다. 학술적인 글은 원래 좀 딱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고, 그런 딱딱한 낱말을 가져다가 적당하게 써먹을 줄 아는 선배들이나 학자들이 부럽기조차 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책에서 (우리 문학의) '설 자리, 갈 길’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다. ‘우리 문학’이었는지 ‘민족문학’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기억이 맞다면 그 말을 쓴 사람은 채광석(1948~1987)이었을 것이다. 이 제목을 보는 순간 번쩍 번개가 일었다. 학술용어라고 하여, 논쟁적인 글이라고 하여 굳이 두 글자짜리 한자어로 되어야 할 까닭이 없다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학술용어라고 하여 쉬운 우리 말로 풀어쓰지 못할 까닭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 그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설 자리, 갈 길’ 이 말 하나로, 좀 건방지게 말하자면 돈오돈수가 되었다고 할까.
현재 우리 나라의 정치 또는 경제 상황이 처해 있는 것은 ‘선 자리’다. ‘서 있는 자리’라고 해도 될 테지만 간단히 ‘선 자리’라고 하면 딱 알맞겠다. 마당히 서 있어야 할 자리는 '서야 할 자리' 즉 '설 자리'가 된다. ‘갈 길’도 마찬가지다. ‘가야 할 길’이라고 해도 되고 ‘나아갈 길’이라고 해도 되겠는데 그냥 ‘갈 길’이라고 하니 딱 좋다. ‘선 자리’는 현황, 현재, 분석, 구조, 배경 따위의 말을 아우르는 것 같고, '설 자리'는 '갈 길'과 호응한다. ‘갈 길’은 효과, 발전, 미래, 전망, 대안 따위의 말을 아우르는 것 같다. 가리키는 개념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강 그러저러한 뜻을 품고 있는 것은 맞다. 매일 ‘현황과 전망’만 달달 외우다가 어느날 문득 내 앞에 나타난 ‘설 자리, 갈 길’은 우리 말의 위대함을 대번에 깨치게 해 주었다.
요즘도 이런저런 학술대회에 가 보거나 보고서, 논문 따위를 찾아 읽어보면 ‘선(설) 자리와 갈 길’이 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기 미술이 설 자리와 갈 길', '기업의 갈 자리와 설 길', ‘한국정치의 선 자리와 갈 길’, ‘민주화 시대, 선 자리와 갈 길’, ‘협동사회 경제의 지금 선 자리, 갈 길’, ‘환경운동의 선 자리와 갈 길’, ‘민주당의 선 자리, 갈 길’, ‘한국 민주주의의 선 자리, 갈 길’ 이런 제목을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다. 선 자리는 두 낱말로 띄어 써야 한다. 갈 길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에서는 제자리걸음을 ‘선자리걸음’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아직 ‘선자리’로 붙여 쓰지 않는다. 그러나 '설자리'는 한 낱말이다. 활동하는 일정한 공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그렇다고 하여 ‘현황과 전망’이 자취를 감춘 건 절대 아니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뻘한 뻔자이다. 책 제목에서도 아직 그 위치가 확고하다. 인터넷 서점에서 ‘현황과 전망’으로 검색하니 170여 권이 나오는데 반해 ‘설 자리와 갈 길’로 검색하니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검색의 실수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믿는다. ‘현황과 전망’이 그대로 널리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설 자리와 갈 길’도 점점 영역을 넓혀나갈 것임을 나는 믿는다.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을 것으로 강력하게 추측되는 학술용어들도 점점 쉬운 우리 말로 바뀌게 될 것임을 믿는다. <배달문학의 길잡이>(김수업)라는 책 제목과 <한국문학 개론>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쉬운지는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족. ‘갈 길’이라는 말을 찾아 헤매다가 ‘일모도궁’(日暮途窮)이라는 낯선 말을 만났다.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막연하다’는 뜻이란다. ‘갈 길이 막혀 있다’고도 해석한다. ‘일모도원’(日暮途遠)도 같은 뜻인데, 의역을 하자면 ‘늙고 쇠약하여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마치 초로(草露)와 같은 우리 인생을 비유하는 듯하여 마음이 갑자기 수수로워진다.
2016.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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