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유재석은 아주 인기가 많다. 인기 비결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타고난 말솜씨, 탁월한 진행솜씨, 수수한 외모도 한몫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인성인가 보다. 주변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감싸 안을 줄 아는 것을 팬들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하도 인기가 높다 보니 유재석을 하느님과 거의 동격으로 받아들여 ‘유느님’이라고 부르는 게 유행이 되었다. 그냥 유재석이라고 부르기엔 많이 부족하다고 느낀 것일까. 유재석 님, 유재석 씨, 유재석 아저씨라고 해도 될 텐데, 유난히 유재석에게는 유느님이라는 별칭이 통용되고 있다.
유느님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방송, 연예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거나 나이가 아주 많은 축에 속할 것이다.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과 글에 대하여 관심이 없거나 유재석이 나오는 오락 프로그램을 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유재석이 케이비에스(KBS), 엠비시(MBC), 에스비에스(SBS)의 간판 오락 프로그램을 죄다 이끌고 있는데도, 그래서 방송 자막에 유느님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도 유느님이라는 말을 잘 모른다면, 뭐, 그럴 수도 있긴 있을 것이다.
유재석을 두고 유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이 되고 보니, 아류들이 속속 생겨났다. 포미닛이라는 젊은여자떼거리가수가 있는데 그 중에 현아라는 춤 잘 추는 가수를 두고는 ‘현느님’이라고 부르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소녀시대라는 젊은여자떼거리가수 가운데 유리라고 하는 예쁘장한 가수의 팬들은 ‘율느님’이라고 한다. 유리도 유느님이라고 해야 할 텐데, 아마 유재석의 유느님과 구분하느라 율느님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두고 ‘-느님’이라고 부르는 데 아주 재미를 붙인 이들이 사람 아닌 다른 것에도 ‘-느님’이라는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나 같은 세대는 ‘통닭’이라고 부르는 것을 요즘은 ‘치킨’이라고들 부르는데 이 치킨을 아주 좋아해서 미치겠는 사람들은 마침내 ‘치느님’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은 ‘돼느님’이라고 부르고, 라면을 좋아하는 무리들은 ‘라느님’이라고도 하겠지.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믿기 어려우면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라. 돼느님, 라느님, 소느님, 회느님, 피느님 같은 말이 줄줄 나온다. 황당하다. 말세다.
‘-느님’은 하느님이라는 말에서 왔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하느님이 무엇인가.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린다고 믿는 초자연적인 절대자’ 아닌가. 그러니까 ‘-느님’은 어떤 분야에서 압도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거나 탁월한 성과를 가진 사람을 존경하는 의미로 붙이기 시작한 접미사쯤 되겠다. 하느님은 하늘+님으로서 접미사는 ‘-느님’이 아니라 ‘-님’인데 이를 잘못 이해했거나 아예 무시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말 만들기는 장난이다. 인터넷에서 이래저래 쓰고 있는 은어이다. 젊은층 사이에서 주고받는 은어라고 해도 되겠다. 그런데 이 말을 방송 화면에서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언론의 보도기사 제목으로도 곧잘 쓰이고 있다. ‘-느님’이 풍년이다. 나는 좀 많이 못마땅하다.
- ‘무도’, 자세히 보아도 유느님은 역시 유느님이다(OSEN)
- 올림픽 최대 수혜 업종은?…치느님보단 편의점 (한겨레)
- 우리의 친구 라면 ‘라느님’ 될까 (SBS)
하느님은 애국가에도 나오는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애국가 1절은 이렇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때 하느님이야말로 어떤 절대적이고 초자연적인 분으로 딱 맞게 쓰인 말이다. 참고로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와 이슬람에서 신을 일컫는 데 사용하는 용어는 ‘하나님’이다. 하느님이라는 말은 어디에나 함부로덤부로 쓸 말이 아닌 것 같다. 그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단속할 필요는 없지만, ‘하늘에 있(다고 믿)는 절대자인 하느님’을 유재석, 현아, 유리 같은 연예인을 높여 부르는 데 갖다붙이는 게 적잖이 못마땅하다.
그래도 연예인을 워낙 사랑하고 좋아하여 ‘-느님’을 붙이는 것을 크게 나무랄 수는 없겠다. 좀 못마땅하면 나 혼자라도 안 쓰면 그만이다. 남들이야 쓰거나 말거나. 하지만 이 ‘-느님’이 먹을거리에까지 번져나가 치느님, 돼느님, 회느님, 라느님, 피느님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쓰는 것에 대해서는 심히 우려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통닭이 맛있다고 ‘절대적이고 초자연적인 어떤 것’에다 비유하다니. 말이 안 된다.
처지를 바꿔 반대로도 생각해 본다. 그럼 좋아하고 존경하다 못해 신으로까지 대접해주고 싶은 연예인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그냥 ‘유재석 님’이라고 하니까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것 같은데 이를 어떡하나. 배 고플 때 닭다리 하나 뜯으면 세상 온갖 시름마저 다 잊은 듯한데, 그렇게 황홀한 맛을 전해주는 치킨을 그냥 ‘치킨’이라고 부르기엔 미안하고 죄스러워 죽겠는데 그럼 이럴 때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래서 하느님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듯이 유느님을 유느님이라고 부르고 치느님을 치느님이라고 부르는데 뭐가 잘못되었나. 이렇게 들이대면 딱히 할 말이 없긴 하다. 그냥 그렇게들 사세요라고 해줄 수밖에.
‘-느님’은 접미사처럼 쓰여 오다가 간혹 그냥 ‘느님’이라는 보통명사로도 등장한다. ‘대한민국 4대 느님 년간 수입을 알아봤더니’라고 제목을 단 기사가 2012년에 이미 등장했다. 대한민국 5대 ‘느님’을 정한 곳도 있다. (유재석, 박지성, 김연아, 성형외과 의사, 치킨이 그것이라 하니 가히 놀랄 노자이다.) 이럴 때 느님은 그냥 하느님을 염두에 두고 쓴 말 아닐까 싶다. 말 만들어 내고 이를 널리 퍼뜨려 내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 싶다. 인터넷이나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같은 데서 잠시 유행하는가 싶던 말을 지상파 방송에까지 갖다 쓰는 재주도 신묘하다. 이 신묘함과 대단함 사이에서 나는 혼란스럽다. 이 ‘느님’의 생명은 얼마나 질길 것인가.
2016.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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