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뽕’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퍼뜩 ‘짬뽕’이 생각났다. 어떤 말과 어떤 말의 조합인지 유추할 수 없었다. ‘국’은 밥먹을 때 곁들여 먹는 반찬의 한가지인지, 아니면 나라(國)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뽕’도 마찬가지다. 처음 생각난 단어는 히로뽕이었고 그다음 생각난 낱말은 뽕나무였다. ‘덕혜옹주’, ‘인천상륙작전’ 같은 영화를 두고 “국뽕 영화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솔직히 ‘국뽕’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이러저러하게 설명해 주는데,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설명을 종합하고 인터넷을 뒤져 보충한 대로 말하자면, 국뽕은 ‘나라 국’(國)자와 ‘히로뽕’의 ‘뽕’을 합성한 말이다. 대개 국가에 대한 자긍심에 과도하게 취해 있는 것을 조롱할 때 쓰이는 말이라고 한다. 더 찾아보면, 일종의 국수주의와 자국우월주의, 극단적 형태의 민족주의 등이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서,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자국을 옹호하는 것을 말한다고 나온다. 한마디로 히로뽕을 먹은 듯이 제정신이 아니게 애국심을 부추긴다는 뜻 아닌가.
그 유래에 대하여 들으면 더욱 기가 찬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외국인들을 향해 ‘두유 노(Do you know) 김치’, ‘두유 노 싸이’, ‘두유 노 김연아ㆍ박지성’을 묻는 한국인들과 한국 기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쓰인 것이 시초라고 한다. 부끄럽다.
외국 기자들에게 김치를 아느냐, 싸이를 아느냐, 김연아를 아느냐고 다짜고짜 물어대는 한국 사람과 한국 기자들도 부끄럽거니와 그런 사람을 조롱하느라 외국 사람과 외국 기자들이 쓴 말을 우리가 지금 ‘자랑스럽게’ 갖다 쓰고 있으니 더욱 부끄럽다. 한심하다. 나이 많은 어머니나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나에게 “국뽕이란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해 줘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국수주의’(國粹主義)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쇼비니즘’(chauvinism)이라고 하는가 보다. ‘무슨 주의’, ‘무슨 이즘’이라고 하면 좀 점잖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의 뜻은 그다지 점잖지 못하다. 자기 나라의 역사ㆍ문화ㆍ국민성 등과 같은 전통이 다른 나라의 그것보다 뛰어난 것으로 믿고,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다른 나라나 민족을 배척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국우월주의도 비슷한 말이다.
그렇다면 국뽕이라는 말 대신에 국수주의라는 말을 써도 될 것 같다. 가령 어떤 영화를 비판할 때 ‘대한민국 흥행영화가 넘어야 할 ‘국뽕’ 논란’이라고 하지 말고 ‘대한민국 영화가 넘어야 할 ‘국수주의’ 논란’이라고 해도 된다. 국수주의 대신에 ‘지나친 애국주의’라는 말을 넣어도 되겠고, ‘비뚤어진 애국심’이라고 해도 뜻은 통한다.
어떤 영화가 국뽕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관심 없다. 애국심을 이용하여 돈을 좀 벌면 어떤가 잘 모르겠다. 애국심을 강요하는 영화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발하여 여기저기 글을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 영화는 안 그런가. 특히 할리우드 영화들은 더 심하지 않은가. 올림픽 중계에서 아나운서들이 지나치게 우리나라에만 유리하게 중계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러거나 말거나 모르겠다. 역시 비판할 사람은 비판할 것이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 문제삼고 있는 영화나 뉴스, 경기 중계들이 과연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자국을 옹호하는 것인지에 대해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상황을 두고 ‘국뽕’이라고 하는, 듣기에 역겹고 징그러운 말을 갖다 쓰는 것에 대해서는 시비를 좀 걸고 싶다. 국뽕이냐 아니냐, 국뽕이 좋은 것이냐 아니냐 하는 식으로 국뽕이라는 말을 자꾸 쓰지 말았으면 한다. 이 말을 아예 없애버렸으면 좋겠다. 나는 ‘국수주의’ 하나면 족하다고 보는데, 그것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지나친 애국주의’, ‘지나친 국수주의’라고 한번 더 강조해 주면 될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저런 자료들을 뒤져보다가 까무러칠 뻔했다. 국뽕의 반대말도 있다는데 그것은 ‘국까’라고 한다. 무조건 국가를 비하하는 사람이나 행동을 ‘국까’라 부른다고 한다. ‘국가’와 ‘까다’의 합성어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런 말을 만들어서 퍼뜨리는 놈들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2016.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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