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고기에 튀김가루를 입혀 기름에 튀긴 것을 우리는 ‘통닭’이라고 말하며 먹곤 했다. 매콤, 새콤, 달콤한 양념을 바른 것은 양념통닭이고, 그냥 튀긴 채로인 건 후라이드라고 했다. 통닭집에 전화를 걸어 의기양양하게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 해 주세요.”라거나 그냥 “반반으로 해주세요.”라고 주문하곤 했다. 처갓집통닭 따위의 상표가 있었더랬다. 통닭이란, 실제로는 ‘털을 뜯고 내장만 뺀 채 통째로 익힌 닭고기’를 가리키는데, 주로 기름에 튀긴 것을 가리켰다.
통째로 익힌 닭고기 중에는 ‘백숙’도 있다. 백숙이란 ‘고기나 생선 따위를 양념하지 않고 맑은 물에 푹 삶아 익히다’라는 뜻이므로 닭백숙, 오리백숙, 청어백숙, 돼지백숙, 소백숙 따위의 말도 성립한다. 후라이드는 ‘프라이드치킨’의 준말이면서 잘못된 발음이다. 프라이드치킨은, 닭고기에 밀가루, 겨자 가루, 소금, 후추를 묻혀 라드 따위로 튀긴 미국식 요리라고 한다. 라드는 돼지기름이라고 보면 된다.
요즘은 다들 ‘치킨’이라고 한다. 나는 가끔 튀긴 닭을 가리키는 치킨과 부엌을 가리키는 키친이 헷갈린다. 아들에게 “이번 시험 끝나면 키친 한 마리 사줄게”라는 실언을 하곤 한다. 통닭과 치킨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통닭은 말 그대로 닭 한 마리를 통째 튀긴 것이라는 생각이 강한 데 반해 치킨은 이 통닭을 먹기 좋게 조각조각 잘랐다는 점이다. 그런 차이 때문에 굳이 치킨이라는 서양말을 가져다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은 복고풍이 불었는지 ‘옛날통닭’, ‘가마솥통닭’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통닭들은 한 마리 통째 튀겨서 판다.
아무튼 이 치킨을 안주로 삼아 맥주 한잔 들이켜는 게 좋은가 보다. 입에서도 만족해 하고 뱃속에서도 잘 받아들이는가 보다. 그래서 ‘치킨에는 맥주다’라는 등식이 성립했다고 할 정도로 자주 회자된다. 심지어 치킨+맥주에서 첫 글자를 따서 ‘치맥’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뒤 ‘치맥은 진리다’라고까지 선언한다. ‘1인 1닭’을 즐기는 젊은층에서 만든 말인 듯한데, 어지간히 나이 든 분들도 치맥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재미있는 것은, 맥주 안주로 뭐가 좋을까 물으면 오징어ㆍ땅콩ㆍ멸치ㆍ한치ㆍ노가리 따위가 줄이어 나오지만 치킨은 어지간해서는 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렇거나 그렇다 치고.
치맥이라는 말이 워낙 유행하고 진리로 받아들여지기조차 하다 보니 이를 이용한 장사꾼들의 놀음이 한창이다. 언론도 덩달아 춤춘다. ‘한류 ‘치맥’ 바람에 맥주 수출 역대 최고’(한겨레), ‘야구장 주차장서 치맥파티, 못말리는 리퍼트’(중앙일보), ‘열대야 ‘치맥’으로 극복’(경남매일), ‘2016 대구치맥축제 폐막…역대 최다 관객’(뉴스1), ‘전북 익산 오늘 무료 치맥 축제...‘써머페스티벌-치맥클럽’ 행사’(국제신문), ‘안동 찜닭골목에서 치맥축제’(안동MBC) 이런 보도 제목을 보는 건 이제 전혀 낯설지 않다. 이런 기사들에서 세태의 변화도 읽을 수 있다.
위키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60년대 초에 나타난 전기구이 통닭이 인기를 누렸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자 조각 튀김닭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KFC는 1984년 서울 종로에 매장을 열면서 한국에 진출했다. 튀김닭이 1970년대 등장한 생맥주의 안주로 각광 받으면서 치맥(치킨+맥주)이 한국인의 음주 문화 한 축을 이루게 된다.”
치맥은 신조어로서 꽤 생명력을 얻었다. 온국민이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웬만한 사람이라면 한두 번은 들어봤을 테고 실제 말글살이에서 이 말을 쓰는 사람도 아주 많아졌다. 예상하건대 국어사전에도 오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신조어, 유행어이지만. 양념 반 마리, 프라이드 반 마리에다가 반찬으로 주는 무를 많이 달라는 뜻으로 ‘반반무’라는 말도 쓴단다. 말 만드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비오는 날 오후이면, 어떤 주당들은 막걸리를 생각한다. 동동주라도 좋다. 안주로는 파전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빈대떡도 좋다. 막걸리 안주로 파전이 1등이라는 데 대해 이견이 없을 것이다. 맥주보다 막걸리를 더 즐기는 이들은 왜 막걸리+파전에서 ‘막파’라는 말을 만들어 유행시키지 못했을까 싶다. 막걸리집 주인들이 ‘막파잔치’를 주최하며 이 말을 널리 퍼뜨리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치맥파티’ 대 ‘막파잔치’의 대결도 해봄 직하다. 나라면 이곳저곳 다 기웃거릴 테지만. 소주파는 어떨까. 소주에는 삼겹살 아닌가. 소주+삼겹살에서 유추하여 ‘소삼’이라는 말도 만듦 직하다. 실제 인터넷을 떠돌다 보면 ‘비오니깐 막파’라는 말이 보이고, ‘소삼’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보인다.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 ‘치맥’은 외국어 치킨(chicken)에다가 맥주를 붙여 만든 말이다. 그래서 ‘치킨’을 ‘닭고기튀김’으로 순화하여 사용하라고 한다. 누가? 국립국어원에서. 만약 많은 사람이 치킨을 버리고 닭고기튀김이라고 말하게 되면 치맥이라는 말도 덩달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닭맥’은 재미없고 ‘튀맥’은 더 별로다. 치맥은 술과 안주로서도 환상의 궁합이지만, 말맛도 제법 그럴듯하다. 하지만 닭고기튀김이라고 하고 나면 재미가 싹 없어진다. 국립국어원에서 아무리 ‘치킨’을 ‘닭고기튀김’으로 순화하라고 해도 따르는 이가 거의 없을 것 같다. 미안하지만, 나도 그렇다. ‘막파’와 ‘소삼’이 ‘치맥’처럼 유행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말맛(어감) 때문이 아닐까, 근거도 없는 이유를 대본다.
2016.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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