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에서 주로 사먹는 음식은 돼지국밥, 부대찌개, 김치찌개 들이다. 돼지국밥을 시키면 어른 손가락 두 개만하게 돌돌 만 국수사리를 하나씩 준다. 국물이 뜨거울 때 국수를 잠시 넣었다가 건져 먹으면 맛있다. 어떤 집에서는 국수사리를 안 주는데 그러면 꼭 물어본다. “국수사리 하나 안 주세요?” 부대찌개를 먹을 때는 라면사리를 미리 주문한다. 당면사리가 있다면 더 좋다. 경상대 앞 어느 김치찌개 집에 자주 갈 때는, 말하지 않아도 찌개 몇 인분에 라면사리를 자동으로 얹어주었다. 단골이었으니까. 김치찌개에도 당면사리를 넣어 먹으면 더 맛있다.
사리는 ‘국수, 실, 새끼 등을 헝클어지지 않도록 사리어 감은 뭉치’를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다. 가느다랗고 기다란 어떤 물건을 작고 동그랗게(또는 그 비슷하게) 만 것이다. 국수사리, 라면사리, 당면사리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옛적 황진이가 읊었다는 시조 가운데 이런 게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여기서 ‘서리서리’는 곧 ‘사리사리’이다. 길고 긴 밤을 마치 국수사리나 라면사리처럼 돌돌 말아 이불 밑에 넣어둔다는 상상력은 가히 획기적이고 그래서 더 아름답다.
냉면을 한 그릇 먹고 양이 차지 않으면, “여기 사리 하나 더 주세요”라고 한다. 그러면 냉면 국물 말고 돌돌 말아 놓은 냉면 건더기를 하나 얹어 준다. 이게 사리이다. 집에서든 식당에서든 찌개에 덤으로 얹어 먹도록 만든 ‘라면사리’라는 제품도 있다. 이 라면사리에는 스프가 들어 있지 않다. 라면만 찌개에 얹어 먹으라는 뜻이다. ‘사리곰탕’이라는 것도 있다. 그냥 곰탕이라고 하면 국수 건더기가 들어있지 않을 것 같은데 사리곰탕이라고 하니, 흔히 식당에서 곰탕을 먹을 때 국수사리를 넣어 먹는 것과 똑같은 그림이 떠오르게 된다.
어느 주말 오후 비스듬히 드러누워 에스비에스 방송국에서 하는 ‘백종원의 삼대천왕’을 보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어느 식당에는 라면사리, 국수사리를 비롯하여 무려 열여섯 가지의 사리가 준비되어 있어서 손님 입맛에 따라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리가 열여섯 가지라니? 라면, 국수, 당면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실눈을 뜨고 가만히 보니, 국수와 라면, 당면, 칼국수, 우동, 쫄면은 기본이고, 가래떡, 떡국떡, 어묵, 소시지, 햄, 군만두, 물만두 같은 게 줄줄이 나오고 심지어 달걀사리도 있다고 한다. 치즈사리, 밀떡사리라는 것도 있나 보다.
사리는 가늘고 긴 것을 동그랗게 만 형태라는 내 고정관념이 헝클어져 버렸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 보니, 부대찌개 집에 갔을 때도 라면 말고도 만두, 햄, 어묵 같은 것을 ‘사리’라고 해 놓고 추가 주문하면 1000원을 더 받는다고 적혀 있었던 것 같다. 그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열여섯 가지 재료를 준비해 놓고 이것들을 다 ‘사리’라고 하니 이상하고 야릇하게 생각된 것이다. 내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일단 만만한 다음(DAUM) 사전을 찾아보았다. 1번 뜻은 앞에서 말한 대로이고, 2번 뜻은 ‘떡볶이나 냉면 따위의 기본 음식 위에 덧얹어 먹는, 국수나 라면 따위의 부가 음식’이라고 나와 있다. 여기에서는 국수나 라면 ‘따위의’, ‘부가 음식’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이 부가 음식을 아주 넓게 해석하고 있는가 보다. 길거나 짧거나 도톰하거나 아주 두껍거나 동그랗거나 아니거나 하는 모양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가 보다. 원래 사리라는 말에는 ‘가늘고 길다’라는 게 전제되어 있는데 요즘은 그런 것은 아예 고려대상이 아닌가 보다.
‘사리’의 본래 뜻은 희미해지고 말았다. 길고 가느다랗다는 ‘모양’의 개념은 거의 무시되고 있다. 대신 어떤 음식에 부가로 더 얹어먹는 음식재료라는 ‘기능 또는 역할’이 더 강조되고 있다. ‘사리’라는 말 스스로 뿌듯해할지 난감해할지 좀 궁금해진다. 하지만 말의 뜻이 이렇게 확장되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반대로 어떤 말은 의미가 축소되기도 하는데 이런 것을 찬찬히 생각하다 보면 참 재미있다.
요즘은 식당에 가서 그냥 “사리 하나 주세요”라고 말하면 바보 취급당할지 모른다. 사리 가운데에서도, 무려 열여섯 가지나 되는 사리 가운데 이것저것 주세요라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아재’ 취급당하게 생겼다. 그래도 나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황진이 집 안방 이불 밑에 들어 있음 직한 뱀 똬리 같은 동짓달 기나긴 밤의 사리가 자꾸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다.
2016.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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