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할 때 상대방을 높여주는 것을 ‘높임법’이라고 한다. 전문가처럼 말하자면 ‘어떤 대상에 대한 높임의 태도가 표시되는 문법 기능’이라고 한다. 높임법에는 객체높임법, 상대높임법, 주체높임법 이런 게 있다고 한다. 그런 것까지 다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말하려고 하자면 10분에 한 마디라도 할 수 있을까. 경어법, 존대법, 대우법, 경양법, 공대법이라는 말도 쓰는가 보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어렵다고 할 수밖에 더 있겠나. 그래도 꼭 생각해 보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서 주절주절 늘어놓아 본다.
“호명하시는 분은 앞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이런저런 일을 잘하여 기관단체장으로부터 상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 상을 주는 행사는 시상식이다. 시상식에 가보면 사회자가 이렇게 말한다. “호명하시는 분은 앞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호명은 부를 호(呼), 이름 명(名)이어서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다. 깊이 생각해 볼 것 없이 ‘호명하는’ 사람은 사회자이다. ‘호명하시는’ 분도 당연히 사회자이다. 그런데 상을 받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야 할 사람은 ‘호명된’ 사람이다. ‘호명받은’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높여 말하자면 ‘호명되신 분은’이라고 하거나 ‘호명받으신 분은’이라고 말하는 게 맞다. 만약 ‘호명하시는 분은…’이라고 말하는 게 맞다면 사회를 보는 사람 본인이 앞으로 나가야 맞다. 그런데 중간에 묘하게 존칭을 뜻하는 ‘-시-’가 들어가고 보니 애매해진 것이다. 이것은 높임법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호명하시는’이라는 말 때문에 모두 어리둥절 얼렁뚱땅 속아넘어가는 것같이 보인다. 사회자는 상 받는 사람을 높이고 싶었을까, 상 주는 사람을 높이고 싶었을까. 모르겠다. 결국은 자기를 높인 꼴이다.
“내가 아시는 분”
이런저런 자리에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 자기가 아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그럴 때 “내가 아는 동생은”이라거나 “내가 아는 어떤 놈은”이라고 하거나 “내가 아는 어떤 친구는”이라고 말한다. 뒷담화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이야기의 소재가 된 사람이나 누가 나이 많고 적은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꼭 “내가 아시는 어떤 분은”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아마 마주앉아 듣는 사람을 높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주 간혹 이야기의 소재가 된 사람이 워낙 고명한 분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말이다. 이 말도 ‘아시는’ 이 말 때문에 말하는 나 스스로를 높이는 꼴이 되어 버렸다. 무조건 아무데나 ‘-시-’를 넣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마주앉아 듣는 사람을 높이고 싶다면, 스스로를 낮추면 된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내리실게요”
주말에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1박2일을 보면 배우들이 버스에 타고 있는데 피디나 작가가 “자, 도착했습니다. 내리실게요”라고 말한다. 방에 드러누워 쉬고 있는 연예인을 깨울 땐 “일어나실게요”라고 말한다.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는데 간호사가 말한다. “체중을 재겠습니다. 체중계에 올라서실게요”라고 말한다. “혈액을 채취하실게요”라는 말도 한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아, 이 사람들이 나를 높여주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연예인으로서, 환자 고객으로서 대접받는다는 생각도 하겠지. 그런데 가만히 뜯어보면 참 웃기는 표현이다. 제대로 말하자면 “자, 도착했습니다. 내려 주십시오”라거나 “내려 주세요”,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게 맞다. ‘주십시오’, ‘주세요’라고 말하여도 얼마든지 높임의 뜻이 담겨 있다. “내리실게요”라고 말하면 말하는 피디나 작가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다들 히히 웃으며 넘어가고 있다. 병원에서도, 히히 웃지는 않지만, 아무 생각없이 말하고 듣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체중계에 올라서 주십시오”, “올라서 주시기 바랍니다”, “혈액을 채취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맞다.
되도록이면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낮춰야만 한다는 의식이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높여야 한다는 것에 사로잡힌 나머지 ‘-시-’를 마구잡이로 넣는 것 같다. 은연중에 직업병처럼 된 것이다. 상대는 곧 고객이니 높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제대로 잘 써야 한다. 말하는 사람도 그냥 대충 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그냥 대충 받아들이고 있으니 별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놓고 보면 정말 부끄럽고 민망한 표현이 주변에 늘렸다. 찻집에서 “커피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하고, 가게에서 “잔돈은 500원이십니다”라고 말하고, 옷가게에서 “손님 몸에 맞는 사이즈(크기)는 없으십니다”라고 말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우리말을 제대로 잘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2016.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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