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꿈자리가 사나웠다. 깨고 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꿈속에서는 뭔가 크고 어마무시하고 굉장한 사건이 몇 가지 있었는데.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밥 먹을 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라디오도 들리지 않는다. 출근하여 할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 본다. 오전에는 무엇을 하고 점심은 누구와 어디에서 먹고 오후에는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저녁 약속장소도 한번 더 생각해 둔다. 그때 그려지는 그림은, 수첩에 적어 놓은 파란색, 빨간색, 검은색 글씨들이다. 썼다가 지운 글자까지도 그려진다. 차 안에서는 음악을 듣는다. 밥 먹을 때 하던 생각을 상기한다. 그렇게 시작한 하루는 예정대로 잘 돌아간다. 술이 덜 깨어 허겁지겁 출근한 날은 엉망진창이 되기 일쑤다. 잘 정돈된 신발장 같은 일정에 갑자기 무슨 중요한 일이 끼여들어도 머릿속은 혼돈에 빠진다. 나는 그런 상황을 싫어하는 편이다.
컴퓨터를 켜놓고 화면을 바라본다. 전자우편을 먼저 읽을 것인지 언론 뉴스를 먼저 볼 것인지 판단이 안되는 일이 잦다. 어느 사이트를 열어놓고도, 심지어 로그인까지 해 놓고도 내가 왜 이 사이트를 들어왔는지 모르겠는 일도 있다. 자주 있다. 사적 용도로 쓰는 전자우편을 열기 위해 ‘다음’으로 들어갔는데 눈길을 끄는 여배우 관련 기사가 있으면 그것 보느라 시간을 보낸 뒤 전자우편을 열어보지 않고 나온다. 그러고선 ‘아차!’하며 다시 찾아간다. 낱말의 쓰임을 알아보기 위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검색창을 열어놓고 갑자기 입력할 낱말이 무엇이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은 하얘진다. 서랍을 열어놓고 내가 꺼내고자 한 문구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떤 동작을 하다가 무엇을 하던 것인지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것은, 손동작과 머릿속 회로에 착오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머릿속이 그만큼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두어 달 전에 흥미있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크러쉬’라는 가수가 있는데 ‘멍 때리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지난 5월 22일 서울 이촌한강공원 청보리밭 일대에서 열린 ‘2016 한강 멍 때리기 대회’에서 70명 중 1위를 했다는 것이다. ‘멍 때리기 대회’는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하자는 취지로 무료함과 졸음을 이겨내고 최대한 오래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을 가리는 대회라고 한다. 이 대회는 올해 처음 열린 것이 아니다. 한강 근처에서 열리는 것 말고도 다른 데서도 비슷한 행사가 더러 열리는가 보다. 이번 대회에는 참가자 접수 하루 만에 1500명이 몰려 일찌감치 마감했다고 한다. 탁 트인 한강을 바라보며 뇌를 쉬게 하고 싶은 현대인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이다. 나도 이런 대회에 한번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잠시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오늘 일, 내일 일, 모레 일 걱정 없이 나를 완전하게 풀어놓고 싶다.
‘멍때리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한번 얻어맞아 멍이 생겼는데 또 거기를 때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냥 아무 일도,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게 앉아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신조어라는 것은 얼마 지난 뒤에 알아차렸다. ‘멍때리다’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더라. 유행어, 신조어에 좀 둔한 편이다. 말이 생긴 모양은 ‘멍+때리다’이다. ‘멍하다’에서 ‘멍’을 가져온 것은 대번에 알겠는데 ‘때리다’는 어디에서 가져온 것일까. 사전에서는 ‘때리다’를 이렇게 설명한다. ①손이나 손에 든 물건 따위로 아프게 치다 ②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세차게 부딪치다 ③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이나 글로 비판하다 ④심한 충격을 주다 ⑤(속되게) 물건값을 낮게 깎아 부르다 ⑥((주로 ‘때려’ 꼴로 쓰여)) (낮잡는 뜻으로) 함부로 마구 하다. 어느 것도 아닌 것 같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오늘 날씨도 덥고 하니 저녁에 생맥 한잔 때릴까?” “야, 나중에 전화 한 통 때려 줘!” 이런 말에서 ‘때리다’는 어떤 의미일까. 그냥 ‘하다’ 또는 ‘마시다’, ‘걸다’라는 표현을 써도 될 텐데 ‘때리다’를 쓴 것은 왜일까. 전하고자 하는 뜻을 더 강하게 나타내고자 하는 심리 아닐까. 은연중 친밀도를 높이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속어나 비어, 은어를 공유함으로써 동질감을 더 높이려는 뜻도 있을까. ‘멍때리다’에서 ‘때리다’도 여기에서 온 것일까.
풀어 쓰면 ‘멍때리다’는 ‘멍하게 있다’는 뜻이다. ‘멍하다’는 ‘얼이 빠진 듯하다’라는 말이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느낌이 있는 경우에도 멍하다고 한다. 얼이 빠진 건 어떤 경우인가. ‘얼’은 정신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한다. 정신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이 빠진 듯한 상태가 멍한 상태이니, 그것이 어떤 상황일지 짐작은 된다. ‘멍때리다’는 표준어가 아니다. 유행어, 신조어라고 해두는 게 좋겠다. ‘멍때리기 대회’가 해마다 열릴 정도로 ‘멍때리다’는 널리 쓰이지만 이 말의 운명은 아직 점칠 수 없다. ‘멍때리다’가 한 낱말이 아닌 만큼 되도록 ‘멍 때리다’처럼 띄어써야 한다. 그렇지만 ‘멍때리다’, ‘멍때리기’가 아주 널리 쓰이다 보면, 한 낱말로 굳어지는 날도 올지 모른다. 말의 운명이란 그렇다.
단 몇 분 동안이라도 멍하게 앉아 있고 싶었는데, 이 따위 글 쓰느라 또 정신을 허비하였다. 얼이 빠진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두뇌를 쉬고 싶어하는 현대인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일과 앞으로 해야 할 과제와 생각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랬다간 목이 달아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한탄하지만 그 감옥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서울시에서 2014년부터 ‘한강 멍때리기 대회’를 마련하여 숨가쁜 현대인들에게 잠시나마 ‘정신적 휴식’을 제공하려고 했겠는가. ‘멍때리다’는 비록 제대로 만들어진 말이 아니지만, ‘멍때리기 대회’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대회가 아닌가 싶다.
2016.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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