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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꼭 필요한 ‘멍때리기 대회’

by 이우기, yiwoogi 2016. 7. 28.

간밤 꿈자리가 사나웠다. 깨고 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꿈속에서는 뭔가 크고 어마무시하고 굉장한 사건이 몇 가지 있었는데.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밥 먹을 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라디오도 들리지 않는다. 출근하여 할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 본다. 오전에는 무엇을 하고 점심은 누구와 어디에서 먹고 오후에는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저녁 약속장소도 한번 더 생각해 둔다. 그때 그려지는 그림은, 수첩에 적어 놓은 파란색, 빨간색, 검은색 글씨들이다. 썼다가 지운 글자까지도 그려진다. 차 안에서는 음악을 듣는다. 밥 먹을 때 하던 생각을 상기한다. 그렇게 시작한 하루는 예정대로 잘 돌아간다. 술이 덜 깨어 허겁지겁 출근한 날은 엉망진창이 되기 일쑤다. 잘 정돈된 신발장 같은 일정에 갑자기 무슨 중요한 일이 끼여들어도 머릿속은 혼돈에 빠진다. 나는 그런 상황을 싫어하는 편이다.

 

컴퓨터를 켜놓고 화면을 바라본다. 전자우편을 먼저 읽을 것인지 언론 뉴스를 먼저 볼 것인지 판단이 안되는 일이 잦다. 어느 사이트를 열어놓고도, 심지어 로그인까지 해 놓고도 내가 왜 이 사이트를 들어왔는지 모르겠는 일도 있다. 자주 있다. 사적 용도로 쓰는 전자우편을 열기 위해 다음으로 들어갔는데 눈길을 끄는 여배우 관련 기사가 있으면 그것 보느라 시간을 보낸 뒤 전자우편을 열어보지 않고 나온다. 그러고선 아차!’하며 다시 찾아간다. 낱말의 쓰임을 알아보기 위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검색창을 열어놓고 갑자기 입력할 낱말이 무엇이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은 하얘진다. 서랍을 열어놓고 내가 꺼내고자 한 문구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떤 동작을 하다가 무엇을 하던 것인지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것은, 손동작과 머릿속 회로에 착오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머릿속이 그만큼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두어 달 전에 흥미있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크러쉬라는 가수가 있는데 멍 때리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지난 522일 서울 이촌한강공원 청보리밭 일대에서 열린 ‘2016 한강 멍 때리기 대회에서 70명 중 1위를 했다는 것이다. ‘멍 때리기 대회는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하자는 취지로 무료함과 졸음을 이겨내고 최대한 오래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을 가리는 대회라고 한다. 이 대회는 올해 처음 열린 것이 아니다. 한강 근처에서 열리는 것 말고도 다른 데서도 비슷한 행사가 더러 열리는가 보다. 이번 대회에는 참가자 접수 하루 만에 1500명이 몰려 일찌감치 마감했다고 한다. 탁 트인 한강을 바라보며 뇌를 쉬게 하고 싶은 현대인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이다. 나도 이런 대회에 한번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잠시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오늘 일, 내일 일, 모레 일 걱정 없이 나를 완전하게 풀어놓고 싶다.


 

멍때리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한번 얻어맞아 멍이 생겼는데 또 거기를 때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냥 아무 일도,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게 앉아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신조어라는 것은 얼마 지난 뒤에 알아차렸다. ‘멍때리다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더라. 유행어, 신조어에 좀 둔한 편이다. 말이 생긴 모양은 +때리다이다. ‘멍하다에서 을 가져온 것은 대번에 알겠는데 때리다는 어디에서 가져온 것일까. 사전에서는 때리다를 이렇게 설명한다. 손이나 손에 든 물건 따위로 아프게 치다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세차게 부딪치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이나 글로 비판하다 심한 충격을 주다 (속되게) 물건값을 낮게 깎아 부르다 ((주로 때려꼴로 쓰여)) (낮잡는 뜻으로) 함부로 마구 하다. 어느 것도 아닌 것 같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오늘 날씨도 덥고 하니 저녁에 생맥 한잔 때릴까?” “, 나중에 전화 한 통 때려 줘!” 이런 말에서 때리다는 어떤 의미일까. 그냥 하다또는 마시다’, ‘걸다라는 표현을 써도 될 텐데 때리다를 쓴 것은 왜일까. 전하고자 하는 뜻을 더 강하게 나타내고자 하는 심리 아닐까. 은연중 친밀도를 높이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속어나 비어, 은어를 공유함으로써 동질감을 더 높이려는 뜻도 있을까. ‘멍때리다에서 때리다도 여기에서 온 것일까.

 

풀어 쓰면 멍때리다멍하게 있다는 뜻이다. ‘멍하다얼이 빠진 듯하다라는 말이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느낌이 있는 경우에도 멍하다고 한다. 얼이 빠진 건 어떤 경우인가. ‘은 정신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한다. 정신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이 빠진 듯한 상태가 멍한 상태이니, 그것이 어떤 상황일지 짐작은 된다. ‘멍때리다는 표준어가 아니다. 유행어, 신조어라고 해두는 게 좋겠다. ‘멍때리기 대회가 해마다 열릴 정도로 멍때리다는 널리 쓰이지만 이 말의 운명은 아직 점칠 수 없다. ‘멍때리다가 한 낱말이 아닌 만큼 되도록 멍 때리다처럼 띄어써야 한다. 그렇지만 멍때리다’, ‘멍때리기가 아주 널리 쓰이다 보면, 한 낱말로 굳어지는 날도 올지 모른다. 말의 운명이란 그렇다.

 

단 몇 분 동안이라도 멍하게 앉아 있고 싶었는데, 이 따위 글 쓰느라 또 정신을 허비하였다. 얼이 빠진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두뇌를 쉬고 싶어하는 현대인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일과 앞으로 해야 할 과제와 생각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랬다간 목이 달아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한탄하지만 그 감옥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서울시에서 2014년부터 한강 멍때리기 대회를 마련하여 숨가쁜 현대인들에게 잠시나마 정신적 휴식을 제공하려고 했겠는가. ‘멍때리다는 비록 제대로 만들어진 말이 아니지만, ‘멍때리기 대회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대회가 아닌가 싶다.

 

2016.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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