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이다. 모래 위에 집을 지었으니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지반을 탄탄하게 다지지 않고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가 그 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사건ㆍ사고가 너무나 많다. 너무나 많아 기억조차 하지 못할 지경이다. 1970년 4월 서울 와우동의 시민아파트 한 동이 폭삭 주저앉았다. 이른바 와우아파트 사고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우리들은 그 후 숱한 사건ㆍ사고를 겪으며 수많은 인명 피해를 경험한다.
1993년 3월 28일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 1993년 10월 10일 서해 페리호 침몰 사고,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4년 12월 7일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9년 6월 화성 씨랜드 화재 사고,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2014년 2월 17일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 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숨이 막힌다. 울화통이 터지려고 한다.
‘싱크홀’이라는 게 있다. ‘지반 내 공동이 붕괴되어 나타나는, 대체로 좁은 규모로 땅이 가라앉아 생긴 구멍. 자연적ㆍ인위적 이유로 지하수가 유출되어 나타나는 현상. 자연적으로는 석회암 지역의 동굴이 무너지는 경우를 들 수 있고, 인위적으로는 공사 현장에서 지하수 유출을 방치하였을 때 발생하고 있다.’(다음 백과사전)고 한다. 전국 곳곳에서 자주 발생하는 이 싱크홀이 우리에게 자꾸 말을 건다.
지금은 고작해야 가로, 세로, 깊이 몇 미터짜리 구멍일 뿐이지만 원인을 철저하게 파헤쳐 완벽하게 고쳐놓지 않으면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큰 구멍이 생길지 모른다는 경고가 들린다. 여의도만한 땅이 한순간에 내려앉을지, 영화 ‘타워링’처럼 초고층 건물에서 화재가 날지 아무도 모르지 않느냐고 자꾸 물어보는 것 같다. 잘 날아가던 멀쩡한 비행기가 떨어지는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 아니냐고 따지는 것 같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잇따라 발생하는 싱크홀을 보면 그런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무섭다.
7월 16일 오후 4시 10분께 경기도 고양시에서 지름 2m, 깊이 2m 크기의 지반침하(싱크홀)가 발생, 길 가던 임모 씨가 구덩이에 빠졌다. 이 사고로 팔과 다리 등에 찰과상을 입은 임씨는 119구조대에 의해 구조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연합뉴스 보도)
7월 14일 오후 4시경 공주시에서 한전 특고압 공사를 하기 위해 굴삭기로 작업을 하던 중 씽크홀이 발생, 포크레인이 씽크홀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씽크홀이 발생한 도로 내부는 텅 비어 있어 그동안 제대로 지반을 다지지 않고 공사를 실시한 것으로 보여 부실공사 의혹을 받고 있다. (특급뉴스 보도)
경기도 이천소방서는 7월 11일 싱크홀이 발생했다는 신고를 받고 즉시 츨동해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안전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이날 발생한 싱크홀은 가로, 세로 1.5m, 깊이 약 2m로, 출동한 소방대원들은 소방통제선을 설치하고 인도 통행을 막은 후 관계기관에 통보했다. (동부중앙신문 보도)
7월 8일 세종시에 따르면 이날 오후 6시께 30분께 금남면에서 대전방향 BRT도로 남세종IC 진·출입 입구에 싱크홀이 발생했다는 시민의 시고가 접수됐다고 밝혔다. 시는 싱크홀이 발생한 현장으로 긴급 출동해 응급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뉴스1 보도)
7월 5일 오후 11시께 서울 송파구에서 지름 1m 크기의 원모양 구멍이 생겼다. 깊이는 2m 정도다. 이곳은 제2롯데월드와 한 블록 떨어진 곳이다. 거리가 1∼2km 반경 내이다. (매일경제 보도)
곳곳에서 땅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있다. 어떤 것은 원인을 간단하게 알아내었지만 어떤 것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대충 얼기설기 땜빵만 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땐 떠들썩하게 제법 소란을 피우지만 며칠 지나고 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잠잠해진다. 양은냄비가 보글보글 끓다가 찬물 한 잔이면 금세 잠잠해지듯이. 뭔가 다른 꿍꿍잇속이 있는 무리들은 “언제까지 그것을 탓하고 살 건가?”라고 묻기도 하고,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경제가 우선이다”라는 해괴한 논리를 들이대기도 한다. 그렇게 수십, 수백 명이 죽어간 사건ㆍ사고도 잊혀져간다. 잊혀짐을 강요당한다. 세월호 사건이 터진 게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하자”고 하는 놈, 제대로 밝혀진 게 하나도 없는데 “언제까지 세월호 타령할 건가?”라고 하는 썩어빠진 놈이 수두룩한 세상이다.
아무튼 이 싱크홀이 큰 사회 문제로 떠오른 건 대충 2~3년 쯤인가 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싱크’가 ‘생각하다’의 ‘think’인 줄 알았다. 그래도 ‘홀’이 ‘구멍’인 건 알았다. ‘생각구멍’이라고 생각했다. 무식하니 할 수 없다. 나처럼 무식한 국민이 많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국립국어원은 2014년 8월 ‘제27차 말다듬기위원회’를 열어 이 말을 ‘땅꺼짐’ 또는 ‘함몰구멍’으로 순화하여 쓰자고 발표한 바 있다. 어떤 이는 국립국어원에 ‘함몰구멍’에서 ‘함몰’이 우리말이냐 따져 묻기도 했다. 국립국어원은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싱크홀을 ‘함몰구멍’으로 바꾸는 경우는 땅이 이미 꺼져 있는 ‘상태’를 가리킬 때 쓰는 것 같다. 국립국어원은 이런 보기글을 누리집에 올려놓았다. “지난 달 19일과 23일 ○○시와 □□시에서 각각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다가 함몰구멍(←싱크홀)에 앞바퀴가 빠져 차량이 일부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반면, 땅꺼짐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현상’을 가리킬 때 쓴다. 보기글을 보자. 보라고 있는 게 보기글이니. “최근 도로가 주저앉는 이른바 땅꺼짐(←싱크홀) 현상이 자주 발생하면서 대형 공사장 주변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싱크홀을 ‘지반침하’로 바꿔 쓰기도 하는가 보다. 7월 16일 일어난 땅꺼짐 현상에 의한 사고를 한국방송공사는 연합뉴스처럼 ‘고양서 길 가던 60대 여성 지반침하에 부상’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지반’은 ‘땅의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고, ‘침하’는 ‘가라앉아 내림’이니 맞는 말이다. 함몰구멍보다는 쉽고, 땅꺼짐보다는 어렵다. 한자말이라는 게 좀 걸린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땅꺼짐’ 또는 ‘지반침하’. 왜 땅이 갑자기 꺼졌는지 원인을 철저하게 밝혀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만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을 조사하여 미리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와우아파트 사고를 겪고도, 삼풍백화점을 보고도, 서해 페리호 사고로 무고한 인명이 그렇게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도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우리는 세월호 사고를 또 당했다. 앞으로 또 어떤 사건ㆍ사고를 당해야 정신을 차릴지 아득하기만 하다.
말과 글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말만으로, 우리글만으로 완벽하게 언어생활을 해나가는 건 불가능한 시대이다. 하지만 너무 무분별하게 외국 것을 가져다 쓰는 바람에 잡탕말이 넘쳐나고 말에 계급이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신문을 갖다 놓고도 우리 국민이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길거리에서 간판을 제대로 못 읽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가. 우리말과 우리글에 얼금뱅이처럼 여기저기 섞여 있는 미국 것, 일본 것, 그밖에 남의 것들을 철저하게 가려내어 쓸 건 쓰고 버릴 건 버리는 노력을 해야만 하지 않을까. 꺼진 땅이 다시는 꺼지지 않도록 잘 메워나가야 하듯이 말과 글에서도 숭숭 뚫린 구멍을 제대로 메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2016.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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