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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발길에 눈길에, 그 길에 [대아고18회30주년]

by 이우기, yiwoogi 2016. 6. 19.

설레고 들떠 잠을 설쳤다. 전날 밤 술을 너무 적당히 마신 탓이다. 제주에서 올라오는 장마는 일요일쯤 경남에 닿을 것이라 했다. 토요일 오전 11시 좀 넘은 시각 서울에서 친구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출발한다고 단체 카톡방에 사진을 올린다. 운전기사는 두 살 후배란다. 흐릿한 사진 속 친구들 표정이 상기되어 있다.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진주에 사는 친구들은 오후 4시까지 와서 이런저런 일을 도우라는 회장, 사무국장의 문자 메시지는 며칠 전부터 몇 번이나 와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설레어서 어떻게 6시까지 기다리겠나.

 

택시를 타고 가는데 태워주겠다는 문자가 온다. 정이다. 배려이다. 화창하고 바람 분다. 아시아레이크사이드 컨벤션홀에서는 무대 설치가 한창이다. 곧이어 행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실은 사무국장이 도착하고 회장도 온다. 행운권 추첨하여 나눠줄 경품을 비롯하여 이름표, 방명록, 특별제작 앨범, 동기회 깃발 등등 엄청나다. 혼자 동분서주하며 고생한 사무국장이 아침에 짐을 옮기다가 등에 담이 결린 모양인데, 걱정도 된다. 책임을 나눠 지고 있던 부회장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당도한다. 축하 화환도 오고, 축하 공연팀도 온다. 홀이 좁아 바깥 발코니에까지 원탁을 놓았고 원탁마다 의자 10개씩 둘러 세웠다.


 

나는 행사장 입구에서 친구들 이름표 나눠주는 역할을 맡았다. 얼굴은 익은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을 들으니 대번에 알겠는데 얼굴이 영 낯선 친구도 쌨다. 하지만 손부터 덥석 잡고 이름이 뭐고?” 물으면 “3학년 몇 반 누구다!” 소리친다. 이름표를 찾아주고 행사 식순과 행운권 번호가 적힌 종이를 나눠준다. 목소리는 한 옥타브 올라가 있고 눈가와 입가에 자꾸 생겨나는 즐거움을 어쩌지 못하겠다. 행사 도우러 온 학생 홍보대사는 선생님,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즐거우신 것 같아요란다. 우리 선배들은 1반부터 10반까지 주간반이고, 11~13반은 야간반이었는데 우리도 그것을 적당하게 잘 이용해 먹는다. 야간반은 바깥에서 앉아 먹으라는 둥 농담을 던진다. 누구 하나 인상 찡그리지 않는다. 반가움이 더 크니까.

 

13개 반 730명쯤 되는 졸업 동기들 가운데 지난해부터, 아니 사실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연락처를 찾아 둔 친구는 400명이 넘고 밴드에 가입하여 안부를 묻곤 하는 친구는 250여 명이다. 우리 반 친구들은 34명의 연락처를 찾았는데 밴드에 가입한 친구는 19명뿐이다. 서울 지역에 사는 친구도 많을 텐데, 재경 동기회 밴드에는 104명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다. 많지 않는 숫자이지만 속절없이 지나가버린 세월을 생각하면 적다고도 할 수 없다. 사무국장은 250여 명의 이름표를 다 만들었는데 이름표가 없는 친구도 나타난다.

 

선생님이 등장하실 때는 저 멀리 바깥에서부터 기운이 느껴진다. 13개 반 담임선생님 가운데 한 분은 유명을 달리하셨다. 한 분은 와병 중이셔서 오시기 힘들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 분은 몇 해 전부터 소식이 끊어졌다. 열 분이 오시기로 했는데 이날 오후 갑작스런 일이 생긴 한 분이 또 불참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님 아홉 분이 오신다. 한 분은 우리 3학년 때 옆반 담임선생님이셨는데 지금은 교장선생님이시다. 괜히 자랑스럽다. 교감선생님도 오시고 총동문회에서도 간부 여러 명이 오신다. 6시 조금 넘은 시각, 준비회의 때 10분쯤 시작하자고 했는데 거의 맞추어서 행사를 시작한다. 나는 지각하는 친구들 이름표 챙기느라 홀 바깥에 있었지만 다 듣고 볼 수 있다.

 

전체 식순을 회장, 사무국장과 내가 짰으니 나는 머릿속에 그림이 훤하다. 사회를 맡은 사무국장이나 무대 단상에 서야 할 수석부회장들이 각자 자기 맡은 일을 척척 해낸다. 회장도 멋지게 환영의 말씀을 한다. 총동문회 선배님이 축하의 말씀을 하고 교장선생님이 격려의 말씀을 한다. 1부가 끝난다. 안도의 한숨을 한 번 쉰다. 2부는 사은회이다. 선생님을 무대 앞으로 모시고 반장들이 꽃다발과 선물을 드린다. 한 분씩 조례 또는 종례를 하신다. 1반 선생님은 좀 화끈하시다. 마이크 잡자마자 종례 끝!” 하신다. 수업 끝나고 종례 길게 하시는 선생님들 앞에서 가슴 졸이며 앉아있던 시절을 생각한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간다. 남강물 흘러흘러 바다로 가듯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다.


 

, 그런데 담담하게 느긋하게 행사를 즐기던 나는 마음속 끈 한 가닥을 툭 놓고 말았다. 30년을 회고하는 동영상을 상영하는 시간이다. 유명을 달리하신 선생님의 옛 흑백사진 다음에 등장하는 여남은 명의 친구들 사진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급하여 그다지도 서둘러 이승을 떠났던 것인지... 졸업앨범 속에서 찾아낸 그들의 얼굴에서 30년 전의 웃음과 추억을 나는 황급히 찾아내어 보았다. 어려웠다. 어지러웠다. 그들도 진양호 언덕빼기에 놓인 아시아호텔 한 자리에 영혼을 보내놓고 있으려나... 보고 싶은 친구들.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내가 한 일은 회장과 사무국장이 하라는 일뿐이다. 행사를 알리는 공식 문자메시지 내용을 몇 번 썼고, 행사 시나리오를 썼고, 수석부회장들이 읽은 경과보고, 회고사 등도 내가 썼다. 분위기를 좀 띄워보려고 밴드에다 감성을 돋우는 글 몇 번 올렸다. 그러니까 쓰는일은 대부분 내가 한 셈이다. 다른 친구들이 몇날 며칠씩 전화를 돌리고 경품들의 포장을 하고 명찰을 만들고 하는 사이 나는 편히 컴퓨터 앞에 앉아 글만 썼다. 그래도 다들 고생했다고 어깨를 두드려 준다. 큰 행사를 치르는 데 견마지로를 다한 느낌이어서 아주 흡족하다.

 

3학년 7반 우리 반은 홀 바깥에 마련된 원탁을 차지한다. 원래 10명만 오면 성공일 것이라 여겼는데 사무국장과 나를 포함하여 16명이나 온다. 담임선생님은 바쁜 일이 있어서 일찍 기념촬영을 하고 가신다. 친구들에는 선생도 있고 공무원도 있고 경찰도 있다. 사업하는 친구도 있고 농업인도 있다. 술잔을 부딪치며 고함을 지른다. 그저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즐겁다. 다들 참 잘 생겼다. 나보다 이마 넓은 친구, 나보다 배 더 나온 친구도 있었지만 세월을 거꾸로 달리는 친구도 있다. 배신자 소리를 듣는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원탁을 들고 옮겼다가 다시 들고 나오는 소동도 벌인다. 비는 멎는 듯하면서도 긋지 않는다. “내 이름이 우기라서 미안하다라는 우스개는 아재개그에 속한다.

 

3부 행사가 시작된다. 그 와중에서 지각생 한 둘이 나타난다. 내가 지키고 선 곳에는 이런저런 관리 품목들이 있어서 나는 쫓아가 술 한잔 들이켜고 급히 돌아오기를 되풀이한다. 갈길이 멀어 먼저 자리를 뜨는 친구들과 선생님께 빠지지 않고 특별제작 앨범을 건넨다. 지각생들 이름표도 찾아 갖다 준다. 반별 노래자랑이 왁자하다. 경쾌하다. 3부 진행을 맡은 여성의 속사포 같은 말을 다 따라잡으려니 귀가 따갑다. 그래도 웃는다. 그래서 즐겁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경품도 하나 당첨된다. 운도 좋지! 10시쯤 모든 일정을 마친다.


 

그렇다고 그렇게 헤어질 친구들이었겠나. 각 반별로 2차를 예약한다. 우리 7반은 늦은 시각까지 문을 열어둘 만한 감자탕집으로 간다. 두 명은 먼저 가고 열네 명이 모였는데 중간에 한 두 명이 또 가고 나는 집에 오니 140분쯤 되었다. 감자탕 집에서 반창회를 한해에 몇 번이라도 하기로 결의하고 반장을 뽑고 총무를 뽑는다. 반장은 학생 때 반장이 당연직이라고 밀어붙이고 총무는 18기 회장까지 3년이나 한 영훈이 맡는다. 의기투합이 자연스럽다. 창밖에는 귀가를 재촉하는 술꾼들의 우산이 춤을 춘다. 감자탕으로 배를 불린 뒤 성기가 운영하는 누나홀닭으로 가서 또 맥주를 마신다. 11명이 생존(!)해 있는 것을 내가 사진으로 찍은 뒤 나는 홀연히 집으로 온다. 아들이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비는 오는데 술에 취했을 애비가 걱정스러웠을 대아고 51회 후배이다. 경품으로 받은 선물은 아들 몫이다.

 

일요일 일찍 밀린 일 처리하러 출근하여 있는데, 서울 친구들 배웅하러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카톡에서 들린다. 잠시 후 공설운동장 앞 칠성이가 운영하는 콩나물해장국 집에 옹기종기 앉아 고개 파묻고 숟가락질에 열중하고 있는 친구들 모습의 사진이 올라온다. 11시쯤 출발하였는가 보다. 함양휴게소에서 똥 누러 간 친구 기다린다는 글이 올라온다. 밴드에는 각자 찍은 사진이 올라오고 댓글이 줄을 잇는다. 오후 3시 넘어 안부를 물으니 서울에 잘 도착하여 헤어졌다는 친구의 글이 올라오기 무섭게 헤어짐이 아쉬워 마지막 한잔을 하고 있는 친구 사진이 올라온다. 징한 친구들이다. 그 징함, 그 징그러움은 가슴에 담으면 추억이 되고 뱃속에 넣으면 든든한 에너지가 되고 머릿속에 넣으면 그리움이 될 것이다.

 

나는 또 이러고 앉았다. 지난해 11월이던가. 재용이 운영하는 중국성에서 졸업 3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춥고 어두운 골목에 서서 기념촬영하던 게. 그로부터 일곱 달 동안 부지런히 챙기고 밀어붙인 추진위원들의 수고로움이 마음에 크게 남는다. 특히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때로는 짜증도 내면서 추진해온 이창수 회장과 정승환 사무국장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머리가 하얘진 선생님,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송골매보다 더 잘 부르시던 교장선생님, 사회자가 학생인지 은사님인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정정하신 선생님, 모두모두 감사하다. 우리의 수많은 사연들을 담아내고 전달해준 네이버 밴드카카오톡에도 감사한다. 이 메신저가 없었더라면 이 정도 모임을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지...

 

아래는 행사에서 읽은 졸업 30년 회고의 글이다.

 

인생 50, 졸업 30 


새벽밥 먹고 도시락 두 개 싸들고 숙호산에 오르면 망진산 앞 남강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습니다. 맑은 바람이 새소리와 함께 하이새시 창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면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선생님이 던진 분필은 정확하게 우리 이마에 꽂혔습니다. 콘크리트 교실 안에서 웃고 떠들고, 그렇게 우리의 청춘은 뜨거웠습니다. 아인 박종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오민교육을 속으로 외우면서 우리는 대아인이 되어 갔습니다.

 

충무공 탄신 기념일에 맞춰 교련복으로 갈아입고 사천읍성까지 행군하는 날에는, 솔직히 야간자율학습 하지 않는 게 더 즐거웠고, 창렬사에 빗자루 들고 갈 때는 진주의 아픈 역사에 숙연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녁 1030분까지 딱딱한 나무걸상에 앉아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단어를 쓰면, 그 자습지를 다음날 제출했습니다. 스쿨버스 안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귀가하면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삼현여고, 진주여고와 미팅이라도 하려고 하면 선생님은 너거 신붓감은 촉석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다며 우회적으로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공부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한 문제라도 더 풀라 하셨고 한 명이라도 더 자신이 원하는 대학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버이의 마음이셨습니다. 매주 월요일 첫 교시에 국어, 영어, 수학 시험을 치렀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은 날에는 손바닥도 맞고 엉덩이도 맞았습니다. 마대걸레 자루가 부러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반에서는 선생님에게 뺨을 맞아 쌍코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수학여행 때 선생님 몰래 술한잔 들이켜며 히히덕거리기도 했지요. 어떤 친구들은 성냥갑 속에 갇힌 것 같은 생활을 견뎌내지 못하였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친구들은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한 뒤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대아고 3년 동안 우리는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했는지 좋은 친구로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친구는 서울로 갔고 어떤 친구는 부산으로 갔고 또 어떤 친구는 대학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러고서 30년이 흘렀습니다. 다행히 진주에서는 진주대로, 서울에서는 서울대로, 부산에서는 부산대로, 창원에서는 창원대로, 사천에서는 사천대로 대아고 18회 친구들이 모임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냇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이 전국 곳곳에 대아의 강, 18회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우리 18회는 2005년에 오민축제를 주관하여 성공적으로 개최하였고 2013년에는 종합우승기를 거머쥐기도 했습니다. 대아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직장생활 중 힘든 일도 많았지만 충무공 탄신 기념 행군을 떠올리면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직장은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도록 일을 시키지 않았으니까요. 수많은 보고서와 기획서를 썼지만 고등학교 때 자습지 내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새발의 피였습니다. 그래도 보고서는 볼펜 두세 개를 한번에 잡고 쓰지는 않았습니다. 외국으로 장기 출장을 갈 때면 이것이 곧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민성민족민본민생민복학창시절 멋모르고 외우던 오민정신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 것입니다.

 

그렇게 묵묵히 앞을 향하여 걸어왔습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힘들어도 참고 어려워도 이겨냈으며 아파도 참았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뒤돌아보니 우리는 50살이 되어 있었습니다. 대아고 정든 친구들과 헤어진 지 벌써 30년이 지났습니다. 거울을 보니 이마는 훤하게 넓어졌고 배는 축 쳐졌습니다. 초롱초롱하던 눈빛은 안경 너머에서 깜박거리고 있고 탱탱하던 볼살도 나이를 견뎌내지 못하였습니다. 문득, 그 시절, 그 친구들, 그 선생님들, 그 선생님들의 별명, 그 교실, 그 운동장, 그 교련복, 그 여고생들이 그리워졌습니다.

 

하늘의 명령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의 나이 50. 우리가 하늘의 명령을 알 리 있겠습니까. 그저 부모님께 효도하고 자식들 잘 키우고 직장생활 열심히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끔 친구들 만나 옛날 이야기하며 소줏잔 기울이는 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잊지 않으며,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환한 웃음 짓는 것, 그것이 하늘의 명령 아닐까요.

 

태어난 지 50, 고등학교 졸업한 지 30. 우리는 대아인이었고, 우리는 18회이며, 우리의 강은 이렇게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2016. 6. 18.

대아고등학교 18회 졸업 30주년 기념행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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