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군 횡천면 개인마을로 간 것은, 사흘 연휴 하루쯤은 녹색을 향하여 내 눈을 열어주고 싶은데다 이 마을 이장댁 농장에 매실이 여물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덕분이다. 농군이었다가 언론인이었다가 시민단체 회원이었다가 종횡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장 형. 그의 집 옆 자그마한 계곡에 세워놓은 놀이터에 쌓인 송홧가루를 좀 떨어내야 할 때가 되기도 했다. 올 한해 수없이 드나들 아는, 모르는 벗들이 마음놓고 퍼질러앉아 소줏잔 기울이며 ‘추억의 백마강’이라도 불러볼 수 있으려면. 구름은 비를 머금긴 해도 쏟아질 것 같지 않고 바람은 유월답지 않게 제법 시원하다. 자동차는 제 고향을 가는 듯 경쾌하고 조용하게 달린다.
횡천에서 미리 고기를 사놓고 우리를 기다리는 형을 만난다. 굳이 필요치 않다는 소주, 맥주, 막걸리, 수박을 바구니에 담고 그리고 상추, 깻잎, 마늘, 쌈무를 곁들이니 잠시잠깐 장본 것치고는 제법 구색을 갖춘 셈이다. 아내가 몇 달 캐디로 아르바이트하던 골프장을 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쇄된다는 횡천역을 지나 진주~하동 국도 2호선 공사가 한창인 현장을 지나 어렵사리 목적지에 도착한다. 나로서는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로 훤한 곳이고 아내는 세 번째쯤인가 본데 볼 때마다 새롭기만 한 듯하여 나들이 장소로서는 일단 합격이다. 형은 집앞 텃밭에서 풋고추를 따고 민들레 보드라운 잎은 아무데서나 뜯는다.
계곡 물 소리는 지글지글 돼지목살 타는 소리에 절묘하게 어울리고 무엇을 쫓자는 것인지 달라는 소리인지 모를 개짖는 소리는 조용한 시골마을을 더욱 정겹게 만든다. 매실 딸 일은 햇살 뒤로 미뤄두고 소주와 맥주를 섞고 아내들은 고전막걸리를 붓는다. 아삭거리는 배추김치는 불판에서 익어가고 우리의 이야기는 밤꽃향기에 스며든다. 횡천강을 모천으로 하던 어린 피라미를 고으고 재핏잎을 요리사로 지명하여 어탕을 끓이니 선계가 따로 없다. 아득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 한들 아쉬울 게 없고 그대로 쓰러져 잠든다 한들 나무랄 게 없다. 유월 햇볕은 따사롭고 산바람은 시원하여 어떤 게 술인지 어떤 게 안주인지 모르겠다.
네 시는 넘어서야 비로소 느릿느릿 매실 밭으로 발길을 옮기었으나 모든 게 싫다. 그래도 어쩌랴. 불콰해진 술기운에 용기가 솟고 백일 뒤 맛볼 매실차 생각에 힘이 솟는다. 매실은 재래종이어서 씨알이 작다. 아직은 춥던 봄날을 아슬아슬하게 견뎌낸 매화를 추억하느라 열매는 단단하다. 몇 년 사이 가장 흉작이라는 형의 너스레를 귓등으로 들으며 낮은 가지를 끄집어 당기고 높은 가지에 매달린다. 매실은 향기롭고 달콤쌉쌀하다. 일 킬로그램에 삼천 원까지 나가던 것이 요즘은 시세가 곤두박질하여 오백 원도 오감하다 할 정도라니 매실을 나무에 매어 둔 채 한숨을 쉬게 생겼단다.
어깨가 아파오고 다리는 저리고 허리도 욱신거리는데 손에 잡히는 매실의 단단함에 매료되고 이따금 씹어보는 열매 맛에 침이 절로 샘솟아 그렇게 힘든 줄 모른다. 이 일로 밥벌이하라고 하면 나는 못하겠소라고 하고 말지 싶다가, 어느해였던지 무람없이 매실값을 후려치던 버르장머리가 기억나 죄스럽기도 하다. 무디긴 하였으나 매실 가시도 엄연히 가시인지라 한두 번씩 어깨며 허벅지를 찔러주는 것이 영 죽지는 않을 듯하여 마음이 놓였는데 내년에는 확 베어버리고 감자를 심을 거라는 말에 왠지 숙연해진다. 그때 흘린 눈물은 맹세코 눈에 들어간 티끌 때문이다. 매실 수확은 한 시간 남짓 걸렸는데 목표한 십 킬로그램이 알뜰하다.
형은 기왕 이렇게 모였으니 뽈똥(보리수)도 좀 따자 한다. 진주에서 나설 때 옥봉 어머니께 옥상에 있는 장독에 매실 담그러 다섯 시쯤 갈 것이라 해두었는데 이러저러하여 시간이 지체된다고 알려드리려 해도 전화가 터지지 않았던 터라 애가 좀 타긴 했지만, 어쩌랴, 그러자고 달려온 횡천인데. 뽈똥은 붉고 굵다. 수확을 하자는 것인지 따먹고 말자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입으로 많이 넣는다. 물컹하고 달달한 맛에 정신이 번쩍 든다. 아!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진다. 약간 쓰고 새콤한 맛이 뒤를 받쳐주니 가히 일품이다. 간식이 될지 음료가 될지 모르겠으나 약이 될 것은 확실하다. 작은 나무 한 그루와 큰 나무 한 그루에 넷이 달라붙어 붉은 보약을 훑어따고 나니 제법 어둑해진다. 서두를 때다. 형은 한사코 필요없다는 매실을 죄다 우리 차에 실어주고 뽈똥도 더 얹어주며 어머니 기다리는 곳으로 달리라 재촉한다.
비실거리기 대마왕인 내가 매실 십 킬로는 어깨에 울러메고 십 킬로는 한손에 꽉 쥐어잡고 보무도 당당하게 본가 대문을 연다. 뒤어어 아내가 뽈똥 바구니를 들고 입장한다. 자식 배 고플까 밥과 재첩국과 생선과 미나리나물을 미리 차려 내어 놓는 모정…. 옥상에 있던 장독은 수돗가에서 애벌씻이를 마친 뒤 예쁘게 뒤집혀 있다. 큰형이 도와주고 갔나 보다. 그런데 웬걸, 십 킬로 담그기에 장독이 오히려 작아 뵌다. 하는 수 없이 더 큰 놈을 다시 갖고 내려와 씻고 불소독을 하고 그사이 매실을 고르고 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아직 취중이다. 매실과 설탕을 일 대 일로 담근 것은 석 달 뒤 매실진액으로 재탄생하여 우리 가족, 처가 가족 들에게 조금씩이라도 골고루 나눠줄 것이다. 뽈똥진액도 몇 달 뒤 추억이 되어 우리 몸속에 스미어 있는 횡천강 바람을 되살려 줄 것이다.
미처 장독으로 직행하지 못한 매실 일부는 어머니가 장아찌를 담그거나 매실주를 담글 것이라 하여 좀 남겨 놓는다. 그래도 남아도는 매실은 우리 아파트 베란다에서 진액으로 담가볼 참이다. 매실이 풍년이다. 몇 달 뒤엔 매실주와 매실진액, 그리고 뽈똥진액이 풍년일 것이다. 하루 동안 쌓은 즐거움과 씻은 피로와, 그리고 수확한 매실과 뽈똥은 아주 오래도록 입가의 미소로 맴돌고 가슴속 추억으로 발효할 것이다. 귀갓길 진주교대와 공설운동장 구내식당 사이 굽잇길에서 음주단속에 딱 걸렸는데, 그곳이 노루목인 줄 익히 잘 아는 우리 아닌가. 만약 내가 운전대를 잡았더라면 이 날의 모든 모든 것은 어찌 되었을까.
2016.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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