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영화를 처음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을 ‘개봉’이라고 한다. 개봉이란 ‘봉한 것을 떼어서 연다’는 뜻인데 영화 필름을 상자 같은 데에 넣어 봉해 두었다가 이날 처음으로 뜯어서 열어본다는 말이겠다. 풀로 붙여 둔 편지봉투, 서류봉투를 열어보는 것도 개봉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開封’이라고 쓴다. 발음은 같지만 조금 다른 개봉도 있다. 한자로 ‘改封’이라고 쓰는 것은, 문ㆍ봉투ㆍ그릇을 봉한 것을 고쳐서 새로 봉한다는 말이다. 앞서 말한 개봉과는 사뭇 다른 뜻이다.
요즘 영화를 개봉한다는 신문기사를 보면 열에 여덟아홉은 ‘대개봉’이라고 쓴다. 대충 몇 개만 찾아보면 이렇다.
-김태리 “영화 ‘아가씨’ 대개봉. 많이 보러 와주세요!” (세계일보)
-영화 ‘빅뱅 메이드’ 30일 스크린 대개봉 (파이낸셜 뉴스)
-메가박스, 오페라 ‘진주 조개 잡이’ 대개봉 (SBS)
-국민 배우들이 선택한 영화 ‘사냥’ 오는 6월 대개봉! (아시아투데이)
대개봉은 무슨 뜻일까. ‘대’는 큰 대(大)이겠지. 그러니까 크게 개봉한다는 말이렷다. 그럼 크게 개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극장이 크다는 뜻일까. 극장 화면이 크다는 뜻일까. 영화 필름을 담은 상자가 크다는 뜻일까.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가 매우 큰데 그것에 부응한다는 말일까. 왜 ‘대’를 붙일까. 어림짐작으로는, 전국 수많은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하는데 그 규모를 놓고 보자면 크다고 할 만하지 않으냐는 뜻 같다. 듣고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전국의 극장 또는 상영관이 몇 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몇 개 상영관에서 동시에 개봉하면 대개봉이다 하는 기준이 있을까. 50%를 넘으면 대개봉일까, 80%를 넘으면 대개봉일까. 반대로 20~30% 상영관에서 개봉하면 소개봉인가. 이런 생각도 든다. 상영관을 많이 확보했으면 대개봉이라기보다는 ‘다개봉’(多開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다개봉이라고 하려니까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다’가 ‘대’의 느낌을 대체할 수 없다.
대개봉이라는 말에서 ‘대’는 무엇이든 크고, 위대하고, 웅장하고, 대단하고 아무튼 그런 느낌을 주려고 일부러 붙인 말 같다. 영화 애호가로 하여금 뭔가 있어 보이게 하여 극장으로 발길을 옮기도록 하려는 꼼수 아니겠는가. 그냥 ‘개봉’이라는 말 하나면 아주 그만일 것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느라 애들 쓴다. 거기에 속아넘어가거나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해 주는 사람들이 즐겁게 잘 산다. 실제 훌륭하고 위대한 ‘불후의 명작’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개봉할 때는 대개봉이라고 할 까닭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포스터에 예전처럼 ‘대개봉’이라고 직접 적어넣는 곳은 별로 없다. 이 말은 언론 보도 제목에서 자주 보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랜드 오픈’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힌 신문 광고를 보게 되었다. ‘오픈’이면 되었을 것을 ‘그랜드 오픈’이라고 할 것은 또 무엇인가. 가게, 상점, (요즘 유행하는) 마트, 마켓이나 사무실, 기관, 단체 같은 것이 처음 문을 열고 장사(일, 사업)를 시작하는 것을 유식한 말로 ‘오픈’이라고 한다. 개점, 개소, 개업, 개시, 개관 같은 말도 있는데 굳이 오픈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말을 갖다 써야 더 있어 보일 것으로 생각하는 심리 때문이다.
여기에다 ‘그랜드’를 붙이면 어떻게 되는가. 대개봉이라고 했듯이 크게 오픈했다는 말이다. 크게 오픈했다고 하려면 그 가게나 상점이나 단체는 도대체 얼마나 커야 할까. 아니면 오픈하는 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야 크게 오픈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기준은 있을까. 물론 없겠지. 그냥 허영심의 발로 아닐까. 뭔가 크게 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홍보 효과를 노리려는 꼼수 아닐까. 역시 신문 제목에서 몇 개만 찾아본다.
-제주신라호텔, 어른 전용 파라다이스...‘어덜트 풀’ 그랜드 오픈 (이뉴스투데이)
-안산시, 호텔 스퀘어 바이 세빌스, 그랜드 오픈 (경인투데이뉴스)
-수성동 4가 대구 첫 원주민 주택조합아파트… 홍보관 10일 ‘그랜드 오픈’ (경북신문)
-“격조 있는 특급호텔, 라마다제주서귀포호텔 6월 그랜드 오픈” (뉴스메이커)
인터넷 포털 ‘다음’에 누군가 물었다. “오픈과 그랜드 오픈의 차이? 궁금하네요.” 그러자 누군가 답했다. “그냥 개점(오픈)하면 될 것을 거대한 오픈(그랜드 오픈)으로 과장한 느낌이 듭니다.” 꼭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다. 또 누군가 답글을 올렸다. “오픈과 그랜드 오픈은 무언가 열거나 개시하거나 시작한다는 뜻에서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표현에 있어서 그랜드 오픈이 좀더 사람들에게 표현할 때 인상적이므로 그랜드 오픈이라고 합니다. 그랜드 오픈은 큰, 거창한, 웅장한 시작이라고 보면 됩니다. 거창하게 시작한다고 이해하시면 되죠.”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들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대개봉’과 ‘그랜드 오픈’이라는 말 속에 우리들의 허영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 허영심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그것을 잡아채는 홍보 실력도 보인다. 무엇이든 큰 것을 좋아하는 심리, 껍데기를 까놓고 보면 별것 아닌데도 번쩍번쩍 빛나게 포장하여 소비자를 꾀어보려는 상술, 그런 것들이 적당하게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는 아닌 척 시치미를 뚝 떼고 버티고 있다.
2016.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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