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 내가 쓰는 글을 눈여겨보는 분이라면 왜 이 말을 들고 나왔는지 알아챌지 모르겠다. ‘째다’의 뜻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 ‘(사람이 얇은 물건이나 살갗을) 날카로운 것으로 찢거나 베어서 가르다’라는 뜻이 있다. 가장 널리는 쓰이는 경우이다. 둘째 ‘(날카롭거나 빠른 움직임이 어떤 대상을) 두 갈래로 가르다’이다. 셋째 ‘(사람이 도랑이나 이랑 따위를) 만드는 일을 하다’라는 뜻이다. 이건 많이 쓰지는 않는 것 같다. 농사 짓는 분들이 씀 직한 말이다.
또 있다. ‘(옷ㆍ신 따위가) 몸이나 발에 비해 좀 작다’는 뜻도 있고, ‘(어떤 일이나 사물의 내용이) 얽이가 세워지다’, ‘(어떤 집단이) 여러 사람들의 무리로 일정하게 이루어지다’, ‘(가구 따위가) 사개를 맞추어 만들어지다’, ‘(일손이나 물건이) 모자라서 일에 쫓기다’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왜 여덟 가지나 되는 ‘째다’의 뜻을 하나하나 늘어놓는가.
요즘 대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강의실로 가지 않고 딴짓하는 것을 일러 “수업을 쨌다”고 말한다. “강의를 쨌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때 ‘째다’는 위 여덟 가지 뜻 가운데 어디에 해당할까. 수업 시간에 교수의 강의를 듣지 않는 것을 왜 쨌다고 말할까. 수업시간표를 째버렸다(찢어버렸다)고 할 만큼 강의를 듣지 않았다는 말일까. 강의 노트를 째버릴 만큼 수업에 관심이 없다는 뜻일까. 알 수 없다. ‘수업을 째다’라고 검색해 보면 제법 많이 나온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흔히 말하고 듣는 말이 되어 있다. 말을 할 때 어원을 따지고 정확한 뜻을 새겨가며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밑도 끝도 없이 생판 낯선 말로 보인다.
이렇게 주어진 일정을 따르지 않고 혼자 샛길로 새어버린 것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알맞은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빠졌다’고 할까, ‘샜다’고 할까. ‘빼먹다’고 해도 될 듯하다. ‘건너뛰었다’라고도 할 수 있겠지. “나 오늘 그 강의 빠졌는데 공책 좀 빌려줄래?”, “오늘은 좀 우울하여 수업듣지 않고 샜어, 어쩔 수 없었어.”, “앞으로 강의 빼먹고 달아나는 학생에게는 벌점을 줄 거야!”처럼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럴 듯하면서도 좀 미적지근하다.
‘땡땡이치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 대학생들이 말하는 ‘수업을 짼’ 경우에 쓰던 말이다. 대학 다닐 때 자주 썼다. 중고등학교에서도 썼던 것 같다. 사전에서는 ‘속어’로 취급한다. ‘수업이나 작업 따위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놀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땡땡이’는 ‘수업 시간이나 작업 시간에 감독자의 눈을 피하여 게으름을 피우거나 노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내가 보고 듣기엔 ‘땡땡이치다’라는 말이 ‘째다’보다 훨씬 좋다. 정겹고 재미있다. 요즘 대학생들은 ‘땡땡이치다’를 알까, 쓸까...
‘씹다’라는 말도 요즘 자주 쓴다. 사전을 먼저 찾아보자. 첫째, ‘(사람이나 동물이 음식을) 입에 넣고 자꾸 깨물어 잘게 자르거나 부드럽게 갈다’, 둘째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헐뜯어 말하다’, 셋째 ‘(사람이 어떤 상태를) 억지로 참거나 견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세 번째 뜻은 좀 낯설지만 앞의 두 가지 뜻은 알 만하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그렇게 쓰고 있다.
왜 멀쩡한 ‘씹다’라는 말을 들고 나왔는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는데 답을 하지 않은 경우 “너, 왜 내 문자를 씹나?”라고 말한다.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는 것이야 그럴 사정이 있다고 하겠지만 나중에도 전화를 하지 않으면 “왜 전화를 씹어?”라고 따진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문자를 어떻게 씹지, 전화를 정말 씹어 먹었을까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에 쓰는 ‘씹다’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여기저기 알아보니 ‘식언’(食言)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식언은 ‘약속한 말을 지키지 않음, 또는 그 어긴 말’이라는 뜻이다. 문자를 보내면 답을 보내고, 전화를 걸면 받아야 하고 만약 못 받는 상황이라면 나중에라도 전화를 해주는 게 우리끼리 정해둔 무언의 약속인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 같다. 그렇게 연결하여 보니 의미가 통하기도 한다. 종이에 쓴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 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정말 그 편지 종이를 염소처럼 씹어 먹어버린 일이 있었던가.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씹다’라는 말을 유추해 낸 것일까. 모르겠다. 여전히 뜨뜻미지근하다.
뜻도 잘 모르면서 어떤 말을 쓴다고 해서 나무랄 수는 없다. 어떻게 하다 보니 ‘쨌다’라는 말이 강의나 수업을 빼먹고 도망간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씹다’라는 말이 보내온 문자에 답을 보내지 않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그 어감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맛이 반드시 마음에 들어야만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수업을 쨌다라고 할 것을,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수업을 빼먹었다, 수업에 가지 않고 (샛길로) 샜다처럼 쓸 수도 있는데, 굳이 ‘쨌다’라고 쓸 필요가 있을까 싶다. ‘땡땡이치다’를 살려 써도 좋겠다.
문자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에도 “왜 문자에 대해 답을 안해?”라고 할 수 있고 “문자를 봤으면 회신을 좀 하지!”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전화를 했는데 못 받았으면 네가 좀 걸면 안 되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 이렇게 말하자니 내용이 길어지니까 단순화하고 압축하게 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게 압축한 말이 ‘씹다’여서 많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6.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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