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타고 다니는 자동차 ‘쎄라토’는 2007년 4월에 샀다. 8월 어느 휴일 늦게까지 일하고 왔더니 아파트 주차장이 빽빽하다. 이중주차할 수도 있었으나 누가 자기 차를 빼다가 내 차를 긁을까봐 아파트 바깥 길가에 차를 댔다. 넉 달 동안 고속도로를 달리며 엔진을 훈련하고 주말마다 쓸고 닦고 하던 차이다. 차 안에서 아들이 과자 부스러기라도 흘릴까 단단히 단속하던 시절이다. 정이 들 대로 든 것이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려고 나섰는데 차 꼬락서니를 보고 나는 기함했다. 운전석 문에서부터 조수석 문까지 뒤쪽으로 한 바퀴 길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게 아주 적당한 강도로 길게 죽 그어버린 것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떤 놈이 지나가다가 장난 삼아 한번 긋고 만 게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뺑 돌아가면서 상처를 남긴 것이다. “잡히면 죽여버린다!” 이를 갈았으나 잡을 방법이 있을 리 없다. ‘하필 왜 내 차를?’ 생각했으나 미치광이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나.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기분이 안 좋았다. 한 달쯤 지난 뒤에 ‘그러구러 헌 차 되는 것이지, 별 수 있나?’라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인생 수양이 따로 있겠나.
내가 사는 아파트는 주차장이 좁다. 이중삼중 주차하기 다반사다. 바쁜 아침 시간에 차 빼 달라며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차 주인 연락처가 없어서 난감해하는 이웃도 쌨다. 그래도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는 것을 보면 다들 참 착하게들 사는 모양이다. 나는 웬만하면 이중주차가 불가능하여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위치에 차를 세운다. 이 아파트에 살면서 터득한 생활의 지혜라고나 할까. 아내가 운전하고 들어온 날도 주차 위치는 나름대로 심각한 숙제이다.
좁은 곳에 차를 세우다 보면 차 문을 열다가 옆 차의 문을 쥐어박는 경우가 허다하다. 범퍼를 긁기도 한다. 자동차는 점점 커지는데 주차장 너비는 예전 그대로이니 불가피하게 생기는 현상이다. 어른들은 그래도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까 옆 차에 실례를 하는 경우가 적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무심코 차 문을 휙 열면 옆 차의 문 어디쯤에 콕 부딪힌다. 만약 옆 차 주인이 이를 보았다면 이맛살깨나 찌푸리게 될 것이다. 자칫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겠지. 보험회사를 부르기엔 경미한 사고이고 모른 척 넘어가자니 아까워 죽겠고, 그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내 차 문을 열다가 옆 차를 살짝 쥐어박는 것을 요즘 ‘문콕’이라고들 한다. 참 잘 지어붙인 말이다. 내 차 문이 옆 차를 아주 살짝, 상처가 날락 말락할 정도로 쥐어박는 모습 또는 소리를 연상하여 지어낸 말이다. 문이 ‘콕’ 부딪힌 정도는 그냥 봐줄 만하다는 생각을 은연중 하게 된다. 산 지 며칠 되지 않은 새차라면 몰라도, 한두 달 지나고 나면 어차피 중고차이니 콕 부딪힌 것은 헌 차로 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제로는 아주 보기 흉한 생채기를 남기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만약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문쾅’이라고 지었으면 어떨까. 실제 의도하지 않게 옆 차 문을 쾅 쥐어박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문콕의 경우를 당하면 참을 만한데, 문쾅을 당하면 화가 날 듯하고 싸움을 벌일 듯하다. ‘문콕’과 ‘문쾅’이 주는 느낌의 크기는 천지차이다. 사람끼리도 길비낌하다가 어깨가 살짝 닿는 경우도 있고 정면으로 부딪는 경우도 있는데, 어깨끼리 살짝 닿은 경우는 문콕에 해당하고 정면으로 부딪힌 경우는 문쾅에 해당할 것이다. ‘문꼭’이라고 하면 문을 꼭 잘 잠근 상태를 이르는 것같기도 하다. 아무튼 문콕이라는 말에는 이해와 용서가 섞여 있는 것 같다. 애교로 봐줄 만한 정도, 가벼운 사과만으로도 충분히 용서될 만한 정도로 보인다.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말이다. 사전에 실릴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문콕이 잦다 보니 이에 대비한 상품도 다양하게 나오는가 보다. 어떻게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콕방지패드, 문콕방지발바닥가드, 문콕방지도어몰딩 같은 제품이 팔리고 있는가 보다. 문콕을 당하여 억울하다는 사연도 많고, 정말 표나지 않을 정도로 콕 일어난 사고인데 엄청난 보상을 해줘야 했다는 사연도 보인다. 외제차를 문콕했다가 1000만 원까지 물어줬다는 기사도 보인다. 잘 사는 동네에서는 이런 시비가 더욱 잦은가 보다. 차도 클 테니까. ‘문콕 예방 주차선’이라는 것도 등장했다. 경기도 안양시가 비좁은 주차공간 때문에 자동차 운전자들끼리 다투게 되는 이른바 ‘문콕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주차선 도색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흰색 주차선 안쪽에 파란색 주차선을 하나 더 그어 거기에 맞게 주차하라는 것이다. ‘문콕 뺑소니’, ‘문콕 테러’, ‘문콕 페인트’, ‘문콕 덴트’, ‘문콕 방지 뎁스’ 이런 말도 보인다.
차가 새차이든 헌 차이든, 국산차이든 외제차이든 고의성 없는 문콕 정도는 봐주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한번 산 차가 영원히 새차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다른 차에게 쥐어박히기도 하고 또는 나도 다른 차를 살짝 스치기도 하면서 사는 게 세상사 아닌가. 타고난 주의력 덕분에 다른 차를 긁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괜한 가드레인을 스치기도 하고 가만히 섰는 전봇대나 유난히 눈에 띄지 않는 도로 경계석 때문에라도 헌차가 되어 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문콕이라는 말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그보다 앞서 내 차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차도 귀중한 것이니 문콕 사고가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게 ‘문콕 예방 캠페인’인가 보다. 주차할 때는 주차장으로 진입하기 전에 동승자를 먼저 내리게 하고, 반대로 출발할 때는 주차장에서 빠져나온 뒤 일행을 태우는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다. 꽤 괜찮은 캠페인이다. 이런 캠페인을 해야 할 만큼 문콕이 일상사가 되었고, 작은 문콕마저도 크게 취급하여 다툼으로 커지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나저나 내 차에 아주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줄을 그어넣은 그 녀석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9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2016.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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