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2월쯤이다. 초등학교 때 쓰던 가방은 낡아서 버리고 새 책가방을 사주기로 하였다. 백화점이나 가방전문판매점으로 가려다가 귀찮아서 그냥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기로 하였다. 옥션! 들어가서 ‘가방’을 검색하였다. ‘책가방’도 검색하였다. 많은 종류의 물건이 나왔다. 눈이 뱅뱅 돌 지경이었다. 선택장애가 생긴 것 같았다. 아들의 눈에 드는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백팩’이라는 말을 만났다. ‘백팩’이라. 등, 뒤라는 뜻의 ‘백’에다가 가방이라는 뜻의 ‘팩’이 붙은 말이렷다. ‘백팩’은 더욱 많았다. 나와 아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첨단 유행을 이끄는 온갖가지 가방이 감나무 홍시 열린 듯, 석류나무 석류꽃 핀 듯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렵사리 하나를 골랐다. 아들은 만족했다.
얼마 뒤 텔레비전에서 ‘복잡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백팩을 앞쪽으로 메어야 한다’는 내용의 뉴스를 보았다. 짐이 가득 든 가방을 등에 메고 있으니 그나마 비좁은 공간이 더욱 비좁게 되는 것은 물론이요, 그 틈을 비집고 내리거나 타야 하는 승객의 불편이 너무 크다는 내용이었다. 안전하지도 않은가 보다. 백팩을 앞으로 돌려 메는 장면을 보니 훨씬 좋아 보였다. 백팩이라는 말은, 사실 잘 모르는 사람은 통 모르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은 다들 잘 알고 있는 말이었다. 온 국민이 보는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었으니.
생각해 본다. 손에 들든 어깨에 메든 바퀴를 달아 질질 끌고 다니든 모두 그 용도는 물건을 안에 넣어 다니는 것 아닌가. 어떤 물건을 안에 담고 다니는가 하는 것으로 나누기도 하는 모양인데 우선 ‘다음 백과사전’을 열어 본다. “가방은 책이나 물건을 넣어, 메거나 들고 다니기에 간편하도록 만든 도구이다. 쓰임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여러 가지이다. 손에 들고 다니는 것, 끈을 길게 달아매고 다니는 것, 바퀴를 달아 끌 수 있게 만든 것 등이 있다. 가죽이나 주크(두꺼운 천)ㆍ비닐 따위로 만드는데, 쓰임새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여러 가지이다. 상자 모양의 여행용 가방, 업무용으로 쓰는 서류 가방, 배낭식ㆍ손잡이식ㆍ어깨걸이식으로 된 학생용 가방, 부녀자들이 화장품 등을 넣어 들고 다니는 핸드백, 화장품 가방 등 종류가 다양하다.” 어떤가?
어느 분의 블로그(Men’s icon)에 가 보니 가방의 종류를 이렇게 10가지로 구분해 놓았다. 백팩(BACK PACK), 어깨끈 가방(SHOULDER BAG), 아동가방(CHILDREN BAG), 서류가방(BRIEF CASE), 손가방(PORTFOLIO), 동전 지갑(COIN CASE), 트레블 백(TRAVEL BAG), 카트 백(CART BAG), 옷 가방(SUIT CASE), 키트 백(KIT BAG). 그런데도 핸드백과 크로스백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갖고 다니든, 무엇을 넣어 다니든 ‘가방’ 하나면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핸드백도 ‘손가방’이라고 하면 된다. 등에 메는 것을 ‘등가방’이라고 해도 될 듯한데, 배낭식가방이라고 해도 좋겠다. 우리는 이미 ‘배낭’(背囊)이라는 말을 써왔다. 배낭은 ‘물건을 담아서 등에 질 수 있도록 헝겊이나 가죽 따위로 네모지게 만든 주머니’를 가리킨다. 요즘 백팩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 세대 사람들은 배낭이라고 부르며 자랐고 우리 아버지 세대는 등짐이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등짐은 그 안에 든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굳이 백팩을 사용하지 않고 배낭 하나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하는 건 내 생각이고, 지금 젊은 사람들은 배낭은 등산이나 야외활동 할 때 쓰는 물건이고, 백팩은 학교 다닐 때 책, 공책, 휴대용 컴퓨터 따위를 넣어 다니는 물건으로 인식할 것이다. 배낭을 뒤지면 양말, 칫솔, 속옷, 라면 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고, 백팩에는 앞서 말한 학용품 등속들이 고개를 내밀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가방’ 이렇게 쓰면 무난할 듯하다.
가장 널리 쓰이는 ‘가방’이라는 말도 원래 우리나라에서 쓰던 말은 아니다. 아마 조선시대에는 가방이라는 말 대신 보따리, 주머니, 등짐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외국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가방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네덜란드 말 ‘kabas’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에 대하여 “이희승이 책임감수한 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에는 ‘가방’의 어원을 네덜란드말 ‘kabas’라고 기재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희승이 일본어 사전을 번역하여 우리말 사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かばん(가반)’이라는 일본말을 일부러 kabas라는 네덜란드 말로 그 어원을 바꾸어 꾸며낸 조작극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http://blog.daum.net/pance73/3342)
어쨌거나 가방은 우리 생활에 완전히 정착한 말이 되었다.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서구 문물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다시피 들어왔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낯선 외국어들이 우리 말속으로 스며들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고 말이란 원래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처음에는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가 외국어가 되었다가 외래어(표준어)가 되기도 한다. 어떤 말은 잠시잠깐 유행어로 머물다 가는 운명을 겪기도 한다.
현재 가방의 한 종류라고 하는 핸드백은 ‘화장품, 지갑, 휴지 따위를 넣어 들거나 메고 다니는 작은 가방’이라는 뜻으로 표준어(외래어)가 되었고, 배낭도 당연히 표준어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고 실게 끈을 이어 붙인 가방을 메고 다니는데 이를 ‘크로스백’이라고들 하나 보다. 사전에는 ‘멜빵이 달려 있어, 어깨에서 허리에 이르기까지 사선으로 걸쳐 매는 가방’이라는 뜻으로 풀어놓고 있다. 가슴과 등짝을 가로지르는 끈에 주목한 이름이다. 아직은 외국어로 취급되고 있는 듯하다.
늘 강조하지만, 나는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말을 갑자기 쓰지 말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가령 백팩이라는 말과 배낭이라는 말이 공존하고 있다면 되도록 배낭을 살려쓰자고 호소하는 쪽이지 무조건 백팩을 쓰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를 등짐이라는 말로 바꾸자고도 절대 주장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 하나라도 이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댄다면 들어주는 사람이 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풀이하다 보면 비로소 몇 사람이라도 나의 의견에 동조해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을 뿐이다.
말과 글은 생각을 전달하고 기록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렇지만 나는 말과 글에는 그 말과 글을 쓰는 사람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쪽이다. 새로운 문물이 외국에서 들어왔을 때 따라 들어오는 말을 그대로 받아서 쓰는 사람과, 이를 어떡하면 쉽고 편한 우리 말로 바꿔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 사이에는 큰 정신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후자의 경우가 바람직하고 본받을 경우라고 생각한다. 후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정치를 맡게 되고 기업체의 수장이 되고 전문가 집단으로서 영향력을 넓혀 나가면, 백팩이나 아웃도어 같은 말이 쉽사리 우리 말 속에 숨어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리 믿는다. 오늘도 결론은 흐리멍덩하다.
2016.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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