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밥은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에 먹는다. 출근시간에 맞추려면 7시쯤 먹으면 되는데 올해 고등학생이 된 아들 등교시간까지 맞추자니 30분쯤 앞당겨졌다. 일어나는 시간도 그만큼 당겨졌다. 보통 때는 밥 반 그릇 정도 먹는다. 정성껏 차려준 밥상인데 먹는 건 대충이다. 어지간하면 국에 말아서 후루룩 마시고 일어선다. 과음한 다음날 아침에는 입안이 까끌거려 아무것도 먹기 싫다. 5시간 이상 지난 뒤에 점심을 먹어야 하는 게 아니라면 아예 숟가락조차 들기 싫을 때가 많다. 아들은 나보다 더 적게 먹는다. 자다가 깨어 화장실 갔다온 뒤 하품하며 앉은 밥상에서 반찬이 눈에 들어올 리 없을 것이다. 저걸 먹고 점심시간까지 어떻게 견딜까 걱정될 정도이다. 물어보면, 그래도 괜찮단다.
그렇게 아침밥 먹고 출근하면 10시쯤 배가 조금 고파진다. 배고픔을 느끼는 두뇌작용을 잠시 속이기 위하여 차를 마시고 따뜻한 맹물을 마신다. 어쩌다가 눈에 보이는 사탕이나 과자를 먹기도 한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새참을 먹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잠시 배고프다고 이것저것 집어먹으면 점심 밥맛이 뚝 떨어지게 마련이다. 되도록이면 참고 버틴다. 견디다 보면 배고픔은 잊어진다. 일이 많은 날엔 배고픈지조차 모르고 넘어간다. 문득 고개를 들면 12시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 날이 많다. 11시까지 특별한 점심 약속이 생기지 않으면 식권을 미리 호주머니에 넣어둔다. 그렇게 오전을 보낸다. 직장인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아내와 아들은 토요일, 일요일에는 9시, 또는 10시까지 잔다. 나는 7시쯤 일어난다. 혼자 대충 차려 먹고 신문도 보고 책도 본다. 약속이나 일이 있으면 씻고 나간다. 아내와 아들은 내가 배부르게 놀고 있거나 나가고 난 뒤 일어나 아침을 먹는다. 아침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다. 그렇다고 점심이라고 할 수도 없는 밥을 먹는다. 우리는 이런 밥을 ‘아점’이라고 일컬었다. ‘아침+점심’이라는 말이다. 한끼로 아침과 점심을 동시에 해결한다는 뜻이다. 아침을 먹은 뒤 점심 시간이 되기 전에 먹는 새참(간식)은 아니다. 그냥 아침과 점심을 겸해서 오전 10~11시쯤 먹는 밥을 가리킨다. ‘아점’이라는 말은 제법 잘 만든 것 같다. ‘점심+저녁’을 가리키는 ‘점저’라는 말이 없는 것도 신기하다. 아무튼 주말과 휴일에는 나와 가족들 밥먹는 시간이 어긋나기 십상이다. 한동안 내 기준에 맞춰 그들의 새벽잠을 흔들어 깨웠다. 직접 찌개를 끓이고 밥을 차려 같이 먹자고 하였다. 요즘은 가족의 생활을 존중해주는 편이다.
아점이라는 말은 ‘아침 겸 점심으로 먹는 오전 식사’라는 말인데 처음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그 젊은이들이 점점 나이를 들어가면서 널리 퍼지게 된 말 같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아침 겸 점심으로 먹는 밥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해놨다. ‘속되게’ 이르는 말이므로 아직 표준어라고 하기에는 좀 모자란 듯하다. 신조어라고 해도 되겠고 유행어라고 해도 되겠다. 그러나 신조어라고 하기엔 이 말이 생겨난 지 꽤 오래 됐고, 유행어라고 하려고 해도 ‘유행’의 개념은 훨씬 벗어나지 않았나 싶다. 따라서 이 말은 이제 표준어의 반열에 오르기 직전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가져옴>
몇 해 전 ‘브런치(brunch)’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언뜻 이 말을 들었을 때 ‘브릿지’를 잘못 들었나 싶다가, 아닌가, ‘브로치’를 잘못 들은 것인가 헷갈렸다. 한참 지난 뒤 그것이 브릿지도 아니고 브로치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브런치는 아침 식사와 점심 식사를 대신하여 그 시간 사이에 먹는 식사를 말한다. 영어 단어 ‘brunch’(브런치)는 ‘breakfast’(블랙퍼스트, 아침)와 ‘lunch’(런치, 점심)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위키백과에서는 이 브런치를 설명하면서, ‘한국어로는 아침 겸 점심, 속어로 아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아점이라고 부르는 말을 브런치라고 하는 것이다. 어느 신문의 경제면 머리 제목에서도 이 영어는 버젓이 쓰이고 있다. 오전 한가한 시간에 읽으라는 뜻으로 만든 것일까. 브런치를 먹으면서 보라는 뜻일까.
이곳저곳을 더 뒤져보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점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된장찌개도 되고 김치찌개도 되고 라면도 되고 국수도 될 것 같다.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브런치를 소개하는 글에서는 대부분 빵, 우유, 치즈, 버터, 딸기, 바나나, 포도, 주스, 생크림 같은 게 보였다. 물론 아점으로 먹는 데서도 빵과 우유로 때우는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은연중에 아점이라고 하면 한국식당을 떠올리게 되고 브런치라고 하면 서양식당 또는 고급 호텔을 떠올리게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본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아점을 먹을 수 없다. 아점이라고 하면 우리 가족처럼 휴일에 한가하게 늦잠자고 일어나 밥 먹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브런치는 누가 먹을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물론이고 토요일, 일요일까지 오전 시간에 그다지 할일이 없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잡담하며, 때로는 시국을 논하며 뭘 먹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이 사람들은 된장이나 라면보다 빵이나 과일, 우유를 더 즐겨 먹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들은, 냄새나는 된장이나 라면은 ‘아점’으로 치부해버리고, 자기들이 먹는 향기로운 빵과 싱싱한 과일들은 ‘브런치’라고 따로 불러주고 싶었던가 보다. 음식에 계층이 생기고 말에도 계층이 생겼다.
먹는 것이 빵이든 우유이든, 된장이든 라면이든 아침과 점심 사이에 먹는 끼니를 그냥 ‘아점’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끼니를 이르는 말로는 아침, 점심, 저녁이 있고, 사이사이에 먹는 새참(간식)이 있다. 깊은 밤에 먹는 건 야식이다. 아침 겸 점심으로 먹는 건 아점이다. 모두 ‘먹는 때’를 기준으로 붙인 말이다. 빵을 먹는다고 달리 부르고, 고구마를 먹는다고 달리 부르고, 통닭을 먹는다고 또 다르게 부르면 말이 어떻게 될까. 브런치도 먹는 때를 기준으로 붙인 말인데 요즘은 먹는 것까지 구별하여 부르는 말처럼 들린다. 말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세분화하는 건 좋을까. 좋을 수 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세분화하는 게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굳이 외국말로 지어 부를 까닭은 무엇일까.
2016.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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