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이 은근히 디스하네.” 이런 말도 들었다. “면전에서는 칭찬해놓고 뒤돌아서는 널 디스할 놈이야!” 영어와 친하지 않은 나는 이 말을 듣고 맨처음 담배 ‘디스’를 생각했다.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이름 정도는 들어서 안다. 아버지 담배 심부름을 제법 한 덕분이다. 그런데 문맥을 잠시 생각해 보니 담배를 가리키는 건 아닌 듯했다. 그다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this’였다. 아무리 영어와 사이가 나빠도 이 정도는 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1년 모두 7년 동안 영어를 배웠는데 아무려면, this를 모를까 보냐 싶었다. 그런데 내가 들은 말 속에서 ‘디스’는 ‘this’도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해석하고 의역하여 갖다붙여도 뜻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면 디스는 무엇일까. 나는 고민에 빠졌다.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러고서 이 말을 잊어버렸다.
며칠 뒤 텔레비전을 보는데 또 ‘디스’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닌가. 전체 흐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험담을 한다’, ‘뒷담화를 한다’, ‘흉을 본다’, ‘욕을 한다’, ‘비난한다’, ‘(나쁜 것을) 폭로한다’와 비슷한 뜻으로 쓰는 것 같았다. 주로 연예인들이 저희들끼리 흉보고 욕하고 비난하는 상황을 설명할 때 ‘디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 같았다. 아하, 대충 뜻을 알아차렸다. 역시 말이라는 건 정확한 어원과 표기와 뜻을 몰라도 문맥을 통하여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는 것이로구나 싶었다. 이렇게 추리하여 나가는 나의 명석함에 스스로 손뼉을 쳐 주었다. 그러고서 다시 이 일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읽고 하다 보니, 주변에서 이 ‘디스’라는 말이 생각보다 흔하게 쓰이고 있는 게 아닌가. 호기심이 불같이 일어났다. 궁금증이라고나 할까. 이런 걸 열심히 찾아서 정확하게 개념정리를 하는 건, 국문학과를 졸업한 나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어떤 사명이라도 되는 듯이. 게다가 평소 우리말과 글을 살려 쓰자도 주야장천 외치고 다니는 나로서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도 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사전을 뒤져 보았다. 국어사전에 이 말이 나올 리 없다. 그래서 포털에서(이 ‘포털’이라는 말은 과연 우리말로는 뭐라고 할지) 검색해 보았다.
디스(diss)는 결례를 뜻하는 디스리스펙트(disrespect)의 약자로 힙합 장르에서 랩을 통해 다른 래퍼나 못마땅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나왔다. ‘다음 백과사전’에 나와 있었다. ‘미국의 래퍼들은 서로 뭉쳐 다니며 패거리를 이루거나 자신이 속한 레이블(음악 기획사) 단위로 뭉칠 때가 많다. 따라서 디스는 계파 간의 자존심을 건 파워 게임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디스전(戰)이 총격전으로 비화한 경우도 있다.’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이 말의 어원이라고 할까, 뜻이라고 할까, 아무튼 전체적으로 이해되었다. 스스로 부지런함에 쾌재를 부르면서.
뜻을 더 읽어가다 보니, 한국의 대표적 래퍼로 통하는 조PD는 “사생활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상대방이 ‘멘붕’이 될 정도로 씹어야 디스죠.”라고 하며 “사소한 것으로 중학생들 삐치듯이 하는 그런 스토리 가지고 디스를 하면 욕만 듣죠. 상대방을 멘붕시키는 것이 진짜 디스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단다. 이쯤 되면 이 ‘디스’라는 말을 함부로덤부로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끼리 그냥 험담하거나 흉보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이 멘붕(이 말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늘은 놔둔다)이 될 정도로 씹어야 한다니 좀 많이 험악하다.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누구에게나 써서는 안 되는 말 아닌가.
이 ‘디스’는 우리들의 말글살이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어 있을까. 신문 제목에서 쓰인 것을 찾아 본다(다른 데도 많지만 우선 찾기 쉬운 것부터). 무대의 여유… ‘셀프 디스’ 지원 유세(한국일보), 힐러리 ‘지하철 굴욕’ 홈페이지서 ‘셀프 디스’로 승화(나우뉴스), 동상이몽 유재석, 서장훈 향해 디스 ‘현주엽 대신 가능’(전자신문), 하현우 “팬들도 우리 얼굴을 몰라”, 셀프 디스(조선일보), 현영 “20년 전 사진, 남편도 못 알아본다” 셀프 디스(TV리포트), 박진영, 양현석 디스·패러디 폭소…“내 애인은 여러분”(마이데일리) 이렇다. 참 다들 디스 담배 많이 피우고들 산다.
앞으로 내가 보는 데서 디스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말로 고쳐 말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줘야겠다. 디스라는 말은 우리가 쉽고 편하게 생각하듯이 써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해줘야겠다. 대신 ‘험담하다’, ‘뒷담화하다’, ‘흉보다’, ‘욕하다’, ‘비난하다’, ‘(나쁜 것을) 폭로하다’와 같은 말을 상황에 따라 찾아서 쓰면 좋겠다고 말해줘야겠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데 가서 나를 디스하겠지.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2016.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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