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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목욕탕에서

by 이우기, yiwoogi 2016. 1. 16.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혼자 목욕탕에 왔다.

왼발이 10센티미터쯤 나가고 오른발이 그만큼 따라붙고

다시 왼발이 10센티미터쯤 앞으로 전진하면 오른발은 마지못한 듯 따라간다.

일어날 때도 수도꼭지를 잡고 한참 동안 씨름한 뒤에 겨우 무릎을 펴고

그러고서 또 한참 끙끙 앓은 뒤에서야 일어나곤 했다.

처음 들어와서 샤워할 때도, 탕에 들어갈 때도 영 불안했다.

나는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보며 조마조마해 했다.

할아버지의 목욕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보다 뒤에 들어왔는데 먼저 마친 듯했다.

나도 마지막 샤워하고 머리 감은 뒤 주섬주섬 챙겨 나오는데

할아버지가 목욕탕과 탈의실 중간에 뒤로 나동그라져 있다.

뚱뚱한 몸을 버둥거리는가 싶었는데 바깥에서 머리를 말리던

젊고 튼튼해 보이는 사람이 잽싸게 달려와 손을 잡아 일으킨다.

젊은 사람 손을 붙들고서도 아주 천천히, 나무늘보처럼 일어난다.

그는 할아버지 손을 꽉 쥔 채 조심조심 힘을 준다. 그게 보인다.

그는 옷도 입지 않은 채 할아버지가 엎질러 놓은

가루소금을 닦아내고 수건 통을 치워준다. 아들은 아니다.

나는 할아버지 뒤에 붙어서서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사태에 대비했다.

잠시 후 젊은 사람은 자기 옷 챙겨 입고 나가고

할아버지는 3-4분쯤 걸려 거울 앞까지 이동한 뒤 몸에 묻은 물기를 닦는다.

잠시 생각한다.

젊은 사람은 순간적으로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떠올렸을까.

짧은 순간에 일어난 그의 행동과 태도는 감동적이었다.

다시 생각한다.

아버지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었을 때

혼자 목욕탕에 가서 저런 봉변을 당한 적이 없을까.

몇 십년 뒤 나도 저 할아버지와 같은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그때 내 곁에는 누가 있을까.

 

2016.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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