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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어젯밤 일기

by 이우기, yiwoogi 2016. 3. 15.

한 자리에서 한 종류로 아홉 시까지 마시기, ‘119 운동을 열심히 하는 내가 소맥과 소주를 이어가며 2차까지 자리를 옮겨 1020분 넘은 시각까지 주절거리고 있었다면 꽤 많이 마신 것이다. 10분 넘게 기다려 우리집 방향으로 가는, 즉 진양호라고 적힌 시내버스를 탔다. 1~2분만 더 늦었더라면 택시를 탔을 것이다. 밤늦도록 공부하고 귀가하는 학생들 사이에 빈자리가 눈에 띄어 잽싸게 앉은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운이 좋았다. 졸지 않고 눈 부릅뜨고 버틴 덕분에 신안초등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비틀거리지 않고 용케 잘 내렸다. 택시를 탔으면 5000원쯤 나왔을 텐데 1200원쯤으로 귀가하게 되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등이 시렸다. 하지만 나는 어깨 펴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전혀 취하지 않은 척 연기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을 빼고는 웬만하게 마셔서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시간 아들이 공부하고 있을 학원을 지나, 한번씩 들르곤 하는 월매김밥집을 지나,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김가네김밥집을 지나, 아들이 가고 싶어하는 마이마이 치킨집을 지나, 평화교회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려는 순간, 나는 안 봐도 되는 것, 본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 무엇을 보았다.

 

어제 그러니까 314일은 화이트데이라고 한다. 원래 이런 무슨무슨 데이 무슨무슨 날이라는 것에 대해 무감각한 편인 데다, 아침 출근준비할 때 라디오에서 그렇게 떠들어대어도 짐짓 지난해에 파리바게트에서 사다준 사탕이 아직 남았으므로 올해는 사탕 안 사줘도 되겠지?!”라고 말했고 아내도 군소리 없이 동의한 터라 무엇을 사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낮 동안 사탕, 떡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가곤 했지만 나는 올해만큼은 열외라고 여기고 있었다.

 

평화교회를 돌아서는 순간 길 건너편에 있는 GS편의점이 눈에 들어왔고, 그 편의점 앞 인도에 펼쳐놓은 사탕바구니 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내 나이 또래의 어떤 남성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조그마한 사탕 한 병 정도는 사야하지 않겠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순전히 봄바람 때문이고 그 남자사람 때문이다. 하여, 편의점 앞으로 걸어가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며 맞춤한 사탕을 찾았다.

 

향수병처럼 생긴 병 안에, 보랏빛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비닐에 싸인 사탕을 발견했다. 옳다구나 생각하며 그것을 집어들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지금은 얼굴 모양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여성 아르바이트 점원에게 건네었다. 뒤이어 지갑에 꽂혀 있던 카드를 건네었다. 그이는 결제를 한 뒤 카드를 먼저 나에게 주었고, 그 사탕병을 다시 나에게 건네어 주었다. 나는 병 손잡이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병은 나에게 붙잡히지 않은 듯했다. 0.01초 만에 쨍그랑! 하며 병이 깨졌다. !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은 산산조각났다. 보랏빛 사탕봉지가 형광등 불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나도 놀라고, 점원도 놀라고, 마침 퇴근하던 편의점 높은 분도 놀라고, 구석에서 물건 정리하던 남자 점원도 놀라 쫓아 왔고, 바깥에서 여태 사탕을 고르던 중년 남자 사람도 놀랐다. 급히 허리를 숙여 유리를 대충 치우고 사탕만이라도 호주머니에 넣어 가려고 하는데, 퇴근하려던 편의점 높은 여성분이 유리에 손대지 마세요!”라고 단호하고 친절하게 소리치며 남자 점원에게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갖고 오라.”고 하였다. 술이 좀 깬 나는 혹시 계산대에 선 여성 점원에게 핀잔이 돌아갈까봐 제가 잘못한 것입니다. 병이 제 손에서 미끄러진 것입니다.”라는 말은 서너 번 했다. 내 앞에서는 죄송하다고 말해 놓고 내가 가고 나면 혹시 아르바이트 여성 점원을 꾸지람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고서 원래 샀던 사탕병보다 조금 작은, 마지막 하나 남은 사탕병을 다시 계산해 달라고 했다. 깨져버린 병에 있던 사탕은 검은봉지에 넣어 윗옷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새로 산 작은 사탕병은 왼쪽 주머니에 넣었다. 편의점 관계자들에게 거듭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휘적휘적 걸어서 집으로 갔다. 바람은 여전히 찼고 어디에선가 풍겨오는 매화 향은 여전히 감미로웠다. 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가로등에 가려져 잘 기억나지 않는다.

 

술집에 일곱 명이 둘러 앉아 직장에서 계약직이 겪는 웃지 못할 일화와 서글픈 일상과 분노를 부르는 비계약직들의 처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어 내어야 하는 자화상을 주고 받았다. 그냥 견디어내지 못할 계약직은 노동조합을 들먹이었다. 한 달도 남지 않은 국회의원 총선거에 대하여서도 뭐라고 말씀들이 오고간 듯한데 잘 정리되지 않는다. 노인들을 위한 경로당이 왜 동네마다 있느냐, 젊은이들이 노인들만큼 투표를 하면 동네마다 청년들 쉼터가 생기지 않겠는가라는 내용의 대화가 오고갔다. 다들 꼭 투표하자고 말했지만 누구를 찍을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사는 동네가 다른 탓일까.

 

한 달 남짓 남은 세월호 2주기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술자리니까 졸가리없이 계획 없이 이런 이야기 저런 주제가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교실을 그대로 둘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말 끝에 나는 단원고도 새로운 학생이 입학해야 하고 그들에게 교실이 필요하니 재작년에 2학년이 쓰던 교실은 정리하여 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 배 한 척이 가라앉은 사고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구하지 않은, 구하지 못한 사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진 뒤에 치워야 할 것이다. 세월호 특별법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조사대상이어야 할 사람이 조사위원이 되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그대로 둔 채 단원고 2학년 교실을 정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고 기억된다.

 

편의점에서 집까지 걸어가면 6~7분 걸린다. 중간에 편의점이 하나 더 있고, 아파트 입구에는 새로 개장한 펭귄유통이 있다. 편의점에는 교복을 입은 채 라면을 먹는 학생이 보였고, 펭귄유통에는 주인 아저씨가 계산대에 서서 매장 안을 휘휘 둘러보고 있는 손님의 발끝에 눈길을 두고 있었다. 바람은 찼다. 옆 아파트 진주맨션 입구에 피어난 동백꽃의 붉은 향기가 전해져 왔다. 이 동백은 한 그루인데도 붉은꽃과 흰꽃을 동시에 피워낸다. 희귀한 일이다. 그런 것을 보며, 느끼며,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집엔 아무도 없었다. 아들은 고등학교에서 10시까지 공부한 뒤 학원으로 가 있었고, 아내는 귀가 중이었다. 이 닦고 발 씻고 잤다.

 

2016.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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