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빈의 소설 ≪혜주≫를 읽고
‘실록에서 지워진 조선의 여왕’이라는 부제가 붙은 ≪혜주≫(도서출판 피플파워)를 처음 만났을 때 왜 하필이면 ‘혜주’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예주’라고 해도 되고 ‘영주’라고 해도 되고 ‘계주’ 이런 이름도 나쁘지는 않지 않은가. ‘아, 혜주는 폐주가 될 운명이구나’라며 억지로 끼워맞춰 보았다. 한글 닿소리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피읖(ㅍ) 다음이 히읗(ㅎ)이다. 혜주가 폐주가 된 것은 ㅎ이 ㅍ 가까이 있는 탓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래야 조선시대에 여왕이 있었다는 가정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일연속극을 보는 듯했다. 5부에 담겨진 57꼭지의 에피소드들은 숨가쁘게 사건을 부르고 일으키고 닫고 하기 때문에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영민하고 순진하기만 했던 공주 혜주가 조선시대 여왕으로 등극하고, 악정과 폐정을 거듭하다가 파멸해 가는 과정이 극적으로 펼쳐진다. 멀쩡하던 한 사람이 정신병자와 같은 판단을 하고 정책을 펴게 되는 과정에는 궁궐 담장 안에서 권세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는 3인방이 도사리고 있다. 한 사람은 스님인데 혜주의 정인(情人)이다. 요즘 말로 하면 경호실장 겸 섹스 파트너라고 할까. 한 사람은 상궁이자 생모이다. 출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한 사람은 점술가 또는 예언가이다. 이 셋이 여왕 혜주를 갖고 논다.
이중 첩자 놀이도 등장한다. 조정은 남파와 북파가 장악하고 있다. 3인방 중 한 놈은 북파의 스파이이다. 여왕은 북파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한다. 배신하고 배신하는, 배신의 이중주가 춤춘다. 남파와 북파는 서로 상대 당파를 잡아먹을 듯이 헐뜯거나 권모술수를 부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그들은 여왕을 옹립할 때도 의외로 쉽게 타협하고 나중에 여왕을 폐위시키기로 역모를 꾸밀 때도 쉽게 타협한다. 오로지 여왕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 복지부동할 뿐이다. ‘여왕 비위 맞추기 대회’를 하는 것 같다. 그러는 사이에 백성들의 삶은 아귀지옥으로 변해버린다.
몇 달 동안 계속된 홍수로 마을 하나가 통째 수몰되어 백 명에 가까운 백성이 죽는다. 살아남은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시위를 벌인다. 하지만 여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백 명이 죽고 네 명의 젊은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헤엄쳐 나와 살았는데 여왕은 “어떤 사람은 헤엄쳐 나왔다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했느냐?”고 묻는다. 인재였을 가능성이 발견되지만 묵살된다. 역병이 창궐하여 수천 명이 죽는다. 재빨리 보고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위치에 있는 관리들은 여왕이 화를 낼까봐 쉬쉬하며 감추기에 급급하다. 기어코 궐내에까지 전염된다. 여왕은 죽어간 백성이 오백 명이 넘는다고 보고하는데도 그건 개념치 않고 “내가 역병에 걸리면 어쩔 것이냐?”고 짜증을 부린다.
여왕을 규탄하는 괴문서가 나돌고 성균관 젊은 유생들이 시위를 벌인다. 유생들의 시위는 이간질로 흩어져 버린다. 여왕의 실정을 규탄하는 벽보를 붙이다 붙잡힌 사람은 혀가 잘리는 단설형(斷舌刑)을 당한다. 젊은 유생 하나가 도끼상소를 벌인다. 그는 말한다. “전하께옵서 즉위한 이래 이 나라는 하루도 태평할 날이 없었사옵니다. 특히 거년(去年)에 발생한 두물섬 참사로 백 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수장되었으며, 금년 역병으로 이천 명이 넘는 무고한 백성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사옵니다. 이 모두는 조정이 무능한 탓으로 빚어진 인재(人災)이며, 게다가 사후조치 또한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도 남음이 있사옵니다. 예부터 무능한 군주는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주상전하! 옥좌에서 물러나시옵소서. 그 길만이 이 나라 종사를 지켜내고….”(351쪽)
그는 ‘주상의 실정(失政) 및 국기문란 7개 죄목(罪目)’을 쓴다. “법적 근거도 없이 별직, 정탐서 등을 만들어 국법을 농락한 죄, 적법한 절차 없이 단설형을 제정하여 권한을 남용한 죄, 조선조의 국정방침인 숭유억불 정책을 위반한 죄, 두물섬 참사를 사전에 막지 못하고 사후처리를 소홀히 한 죄, 내수사 쌀 매점매석 의혹 사건의 재수사를 막은 죄, 혜민서의 역병 예방 및 사후조치를 소홀히 한 죄, 궐내에 정인(情人)을 끌어들여 음사(淫事)를 일삼은 죄”(353쪽) 그러나 여왕은 지부상소(持斧上疏)하던 이 유생을 잡아가 목을 베어버린다.
절대왕정국가이던 조선시대에 왕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다. 삼정승(三政丞), 육조판서(六曹判書), 삼사(三司) 등 사대부 선비들이 아무리 간언하고 직언해도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힘으로 누르고 인사권으로 누른다. 때로는 ‘쏘아보는 것’으로도 누른다. 없던 법도 제마음대로 만들고 형벌도 제멋대로 제정하여 백성을 핍박한다. 살아나갈 재간이 없다. 정탐서(偵探署)를 만들어 백성과 관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정도로 엄동설한 같은 세월이 이어진다.
이쯤 읽다 보면 지금 우리도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포털사이트 아고라에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고 잡아가두고,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고, 수백 명의 승객을 실은 배가 바다에 거꾸로 처박혀도 진상규명은커녕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정치하겠다는 여당대표를 배신자로 몰아 내쫓아버리고, 개인간의 사사로운 대화가 오고가는 카카오톡도 영장 없이 들여다보겠다는 지금 우리의 현실은 혜주가 통치하던 조선시대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소설을 읽는 이라면 누구든지 지금 우리 사회를 자꾸 돌아보게 될 것이다. 곳곳에 등장하는 사건사고들은 과거의 일인지 현재의 일인지 구분짓기 힘들다. 왜 왕의 이름이 예주도 아니고, 영주도 아니고, 계주도 아닌 혜주인지 어렴풋이 짐작된다.
왕이 될 사람은 세자로 책봉될 때부터 수년 동안,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제왕학을 공부한다. 백성을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하고 선비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며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몸과 마음과 정신을 닦아야 하며…. 왕이 되는 길은 길고도 멀다. 온갖 권모술수와 감언이설을 극복해야 하며 반대세력의 살해음모에서 용케 살아남기도 한다. 그렇게 왕이 되어야 비로소 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혜주는 그런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어느날 갑자기 왕이 되었고, 어질고 훌륭한 선왕들의 행적을 모범으로 삼기보다 3인방의 그늘에 묻혀 지내는 바람에 조선시대 최고 불행한 왕이 되고 말았다. 그 시대 백성들도 가장 불행한 시절을 살았다.
소설은 자꾸 우리에게 묻는다. 2016년 현재 한국 사람들은 행복하느냐 묻는다. 정말 대통령이 될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선정을 베풀고 있느냐, 구중심처 궁궐에 틀어박혀 백성들과의 소통을 뿌리친 채 홀로 제왕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하고 비판하여야 할 국회와 사법부는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느냐, 대통령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권력자들은 혜주를 둘러싼 3인방과 같으냐 다르냐, 그리하여 민주적 절차와 민주적 토론과 민주적 결정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느냐 자꾸만 묻고 있다. 아, 그러나 답은 못하겠다.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이다. 427쪽이나 되는 책을 이틀만에 다 읽는 건 기록이다. 그럼에도 속도는 더뎠다고 할 수밖에 없다. 까닭이 있다. 지나치게 많은 오자 때문이다. 띄어쓰기도 많이 틀렸다. 연필을 들고 하나하나 표시했다. 잘 모르는 것은 사전을 찾아보았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읽으면서 찾아보고 그러면서 배우자니 더딜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이야기의 흐름에 매몰되어 숲만 보고 쫓아갔다고 하더라도 편집자가 냉정하고 꼼꼼하게 나무를 들여다보고 바로잡아 주었으면 좋았겠다 싶은 곳이 아주 많았다. 아쉬운 부분이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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