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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즐거움

마음이 무거운 책 읽기-대학이란 무엇인가

by 이우기, yiwoogi 2015. 5. 14.

대학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이런 책을 읽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은 무겁다. 일개 직원일 뿐인데 꼭 읽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솔직히,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어차피 대학교육 정책은 대통령청와대 교육수석-교육부 장관-교육부 차관-교육부 국장-한국대학교육협의회-그 외 이런저런 협의회-대학 총장-대학 보직교수-대학 과장급 이상 간부 들의 고민과 열정, 아이디어에서 결정될 것 아닌가.

 

직원의 한 사람으로서 대학교육 정책을 새로 만들면 얼마나 만들고 바꾼다면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육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고 나라와 겨레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할까 하는 고민도 모두 그들이 먼저 더 크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대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사유, 논의, 토론, 논쟁은 우선 그들이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사람 노릇하듯, 대학을 둘러싼 사회 전반의 논의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눈대중으로라도 알고 있어야 직원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을까 싶어 몇 권 사 본다. 어떤 책은 머리말만 읽었고 어떤 책은 반쯤 읽다가 던져뒀고 또 어떤 책은 밑줄을 그어가며 열심히 읽었다. 읽고 나서 리포트를 쓰거나 시험을 볼 것이 아니라서 주마간산으로 훑어봤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 모르겠다.

 

최근에 읽은 건 <진격의 대학교>이다.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대학 직원으로서 그동안 해온 많은 일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일었다. 대학이 기업의 노예가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더욱 철저하고 완벽한 노예가 되었노라고 언론에 자랑질을 해온 게 아닌가 싶어졌다. 그리하여 기업들이 우리를 먼저 봐주고 더 잘 봐주기를 바랐던 게 아닌가 싶어졌다. 대학마다 더 힘세고 튼튼한 노예 되기(노예 기르기) 경쟁을 한 것은 아닌가 되물어 보았다. 몇 언론사가 하는 대학평가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발버둥쳤다는 비판을 받아도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기업은, 입사하자마자 외국에 출장 보내고 엑셀파워포인트를 능수능란하게 만들고 발표하며 시장분석고객관리 등등을 모두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인재를 요구한다. 기업은, 기업총수가 무슨 짓을 하든 문제제기하거나 시비 걸거나 딴죽 거는 나쁜 인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은 적게 받더라도 일은 더 많이 하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야근, 철야, 휴일근무도 불사할 수 있는 멸사봉공의 정신자세를 갖춘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 그건 기업으로서 당연한 요구라고 봐주자.

 

그것을 잘 아는 언론은 대학의 국제화 지수, 취업률, 영어강의 비율, 산학협력 지수와 같은 지표를 만들어 대학을 한 줄로 세운다. 대학에서는 언론이(그것도 영향력이 아주 높은) 발표하는 대학평가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다. 모든 기준은 취업률에 맞춰진다. 취업률을 높이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은 폐기하거나 개선()해 버린다. 학과가 없어지고 취업 관련 동아리를 적극 지원하는 등 다양한 취업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왔다. 대학은 기업과 언론의 합창에 !”라고 말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대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학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진리는 무엇인가따위 추상적이고 고상한 고민은 쓰레기통에 내팽개친 지 오래다.

 

대학은 회의(懷疑), 사유, 탐구, 토론, 논쟁, 비판이 사라진 무감(無感)의 사회다. 취업률을 향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100m 달리기를 하고, 모든 구성원들이 앞으로나란히를 할 때 혼자 일어서서 이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부터 대학 교직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앞을 향해 나란히 걸어가는데 누군가 뒤돌아서서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라고 물을 수 있는가. 취업, 평가, 영어, 산학협력, 국제화와 같은 명제 앞에서 이건 참명제 맞습니까?”라며 회의하고 사유하고 토론하고 논쟁하고 비판할 수 있는가.

 

한국의 대학은 사회 전반의 교육생태계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었다”(<진격의 대학교>, 134, 이하 모두 이 책)는 지적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학평가는 반() 자본주의 운동의 온상이었던 대학을 온순한 양들로 길들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빗장이 열리기 시작하던 1994년에 중앙일보 대학평가가 시작된 것도 이런 궤적과 무관하지 않다”(180)는 지적에 고개 끄덕이지 않을 수 있을까. “한국사회는 비판적인 것을 공격적인 것으로, 창의적인 것을 엉뚱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무척 강하다. 그런데 대학이 그 비판과 창의를 전혀 묻지 않으니 기존의 고정관념은 확대 재생산된다.”(210)는 말에는 토를 달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것에서는 맞는 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숙은 없고 성장만 강조하는대학의 진격”(214)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대학은 시장의 편협한 명령에 항복하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공적 기관이다.”(249)라는 말 앞에 고개 숙인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학은 20대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대학은 우리 겨레와 나라의 앞날을 위하여 지금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대학이 기업의 주구(走狗)가 되고 자본의 앞잡이가 되고 돈의 노예가 될 때 우리 사회의 밑바탕을 받쳐주고 깜깜한 시대의 앞길을 밝혀 줄 것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거듭거듭 되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일개 직원일 뿐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마음이 무겁다. ‘앞으로나란히하여 길게 늘어선 줄의 어디쯤 서 있는 나는 뒤돌아서서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라고 물어볼 용기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 지금쯤 물어보지 않으면 정말 깜깜한 낭떠러지로 모두 나란히 나란히 낙화처럼 떨어져 내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게 되었다.


 

2015. 5.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