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이라는 말이 있다. 80년대 말 대학 다닐 때 이 말을 참 자주 썼다. 질곡은 옛날 죄인을 잡아가둘 때 쓰던 차꼬와 수갑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다. 수갑은 요즘도 쓰는 말이고 실제 연속극이나 영화에서 더러 볼 수 있어서 다들 잘 알겠지만 차꼬는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차꼬는 두 개의 긴 나무토막을 맞대고 그 사이에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를 채우게 한 형구(形具)이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고 옥에 갇혀 있을 때 목에 차고 있던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질곡의 형에 빠지게 되면 꼼짝달싹 못하게 된다. 죽을 지경이 된다.
80년대 말에 왜 이 말을 자주 썼을까. 질곡은 지나친 속박으로 자유를 가질 수 없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대통령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아니 그 전 박정희가 철권을 휘두르고 있을 때부터 우리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독재정권이었다는 말이다. 그것도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군사독재였다. 찬탈이란 국가 권력, 정권 등을 반역으로 빼앗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 시기에는 말하는 자유, 글 쓰는 자유, 놀러 다니는 자유, 모여 떠드는 자유, 집회와 시위의 자유, 출판의 자유 같은 걸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사상의 자유도 갇혀 있었다. 질곡의 세월이었던 것이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구호 속에 질곡이라는 말이 곧잘 들어 있곤 했다.
2012년 5월 나온 법륜 스님의 책 ≪새로운 100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분단과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그 후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냈으나, 아직도 분단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양극화의 덫에 갇혀 있습니다.”(6쪽) ‘질곡’이라는 낱말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1980년대에서 2010년대로 30년, 즉 한 세대만큼이나 지나왔건만 ‘질곡’이라는 말은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모순을 가장 아프고 절실하게 찔러주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였던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 물러나고 김영삼 문민정부, 김대중 국민의 정부, 노무현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정말 민주화했다고 생각했는데, 산업발전ㆍ경제발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에도 가입하였는데, 남북 분단은 아직도 우리의 두 손과 두 발과 목을 옭아매고 있는 질곡이었던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남북 정상 회담을 하면서 적잖이 통일에 다가가고 있다고 여겼는데, 2012년 법륜 스님이 말하였고 우리가 느끼고 있었듯이 분단은 우리에게 질곡이었던 것이다. 왜 그리 됐을까. 이명박 정부 때 남북 관계가 더 어두운 과거로 뒷걸음질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남북 관계만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라는 나무는 남북 분단의 질곡에 갇혀 밝은 햇빛을 보지 못하고 가지를 널리 뻗치지 못하고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은 죄인이 되어 손발을 묶인 채, 소가 되어 코뚜레에 꿰인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꼴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행동하려고 했다가는 뒤통수에 철퇴를 맞을 것만 같다. 종북, 좌파라는 말은 수많은 양심과 사상, 행동과 실천을 단숨에 옭아매는 질곡이다. 정부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듣고 가라는 곳으로만 가게 만드는 수단이다. 말 잘 듣고 질문 하지 않는 국민으로 만드는 마약이다. 이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리는 2012년을 보냈고, 또한 2015년을 보내고 있지 아니한가.
정권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면 종북, 좌파 딱지를 붙인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면 종북이라고 몰아붙인다. 노동 개악을 반대하며 시위를 하면 폭력 좌파가 되어버린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데 대하여 90%의 역사학자가 반대하자 그들을 싸그리 종북 좌파로 규정지어버리는 정권 아닌가.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운동을 두고 북한 공작기관의 지령대로 움직이는 종북 좌파들의 행위라고 지껄이는 세상 아닌가. 노동 악법 저지를 외치다가 수배를 당하여 조계사에 몸을 의탁한 민주노총 위원장을 절에서 거두어들이려 하자 스님들을 종북 좌빨이라고 외쳐대는 세상 아닌가. 국군 장병들에게 보급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이유를 종북 좌파 때문이라고 말한 군 지휘관이 버젓이 어깨 펴고 다니는 꼴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아니한가. 학생들의 무상급식 폐지에 반대하고 나선 엄마들이 종북 좌파로 매도당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아니한가.
분단이 만들어낸 종북 좌파라는 질곡은 우리 사회의 어둡고 민감한 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음험한 웃음 흘리며 으스스한 기운 내뿜으며 배회하고 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수갑을 채운다. 조금만 자기와 다르면 차꼬를 채운다. 조금만 삐딱하면 코뚜레를 꿴다. 조금만 목소리 높이면 재갈을 물린다. 역사는 광복 직후 극심하던 좌우대립의 시기로 급격히 퇴행하였고 인식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휘두르던 철권통치 아래 납작 엎드린 지경이다. 무섭다. 두렵다. 겁난다. 이런 세상에서도 짐짓 아무런 일 없다는 듯이 살아지는 삶이 부끄럽다.
2015.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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