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집에 오니 적십자 회비를 내라는 지로 용지가 와 있다. 1만 원이라고 한다. 철들고 처음 적십자 회비를 낸 때가 1992년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였던 것 같은데, 4000원 내었다. 그때 술집에서 먹는 소주 한 병 값이 1000원쯤이었던 것 같다. 두말없이 냈다. 금액이 그리 많지도 않을 뿐더러 하는 일이 너무나 좋은 일이고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부모와 함께 한 가구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회비는 매번 내가 은행에 가서 내었다.
대한적십자는 110년 전 ‘널리 구제하고 고루 사랑하라’는 고종황제의 칙령 47호에 따라 1905년에 창립되었다고 한다. 경남지역만 놓고 보면, 경남적십자사는 지난해 4대 취약계층과 저소득층 1만 5538가구, 2만 6035명에게 다달이 생필품을 전달하고 1만 2353명의 봉사원이 1만 9037회, 89만 8430명에게 우리의 정성과 사랑을 대신 전달했다고 한다(경남일보 12월 9일자 참조). 참 고마운 일이다.
올해 지로용지에 보니, ‘나눔이 희망입니다’라고 해 놓고 ‘적십자회비는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해 놨다. ‘지로용지 금액보다 더 큰 사랑을 실천하고자 할 때에는 가상계좌를 통하여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고도 설명하고 있다. 그런 훌륭한 분들이 많은가 보다. 참 좋은 세상이다.
해마다 적십자 회비를 내는 일에 대하여 단 1초도 고민한 적이 없다. 전기요금 내듯이, 아파트 관리비 내듯이 냈다. 거창하게 누구를 돕는다거나 사랑을 실천한다는 생각도 크게 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불행한 일을 당하여 적십자의 도움을 받게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하기 위하여’라는 생각은 좀 했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나는 적십자 회비를 내지 않았다. 올해도 낼까 말까 망설여진다. 까닭이 있다.
2014년 10월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선출된 김성주는 적십자 회비 조회가 가능한 5년간 회비를 단 1원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김성주는 성주그룹 회장이고 성주재단 이사장이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부자다. 적십자 회비는 세금과 달라서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금액이 똑같다. 5년치 다 모아도 5만 원이 안 된다. 이런 분들 한 끼 밥값도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이 사람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기어이 앉혔다.
이 일을 두고 말이 많았다. 나는 작년 10월 2일자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바쁜 아침이지만 이 한 마디는 해야겠다. 5년 동안 적십자회비 한 푼도 안 낸 사람을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앉힌다는 게 말이 되나? 뒤늦게 특별회비 내면 다인가? 정말 정나미 떨어져 못 살겠다. 아침부터 입에서 더러운 욕 나오려고 한다. 에이, 신발끈! 더 부끄러운 꼴 당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라. 안 그러면 나도 5000원 회비 안 낼란다.’ 참고로, 나는 ‘적십자, 직원들 거액 횡령 4년간 몰라’ 이런 기사가 보도되던 2013년에도 적십자 회비는 냈다.
경찰청장이 자기는 횡단보도 빨간불에 건너면서 국민들에게 파란불에 건너라고 하면 되겠나. 국세청장이 자기는 탈세를 일삼으면서 부하직원더러 탈세를 막으라고 하면 영이 서겠나. 교장선생님이 자기는 날마다 점심 먹고 출근하면서 다른 선생님들은 아침 9시까지 출근하라고 하면 입이 나오겠나, 안 나오겠나. 불의한 방법으로 병역을 면한 사람이 국방부장관을 하고 있으면 장병들이 뭐라고 하겠나. 부부가 날마다 쌍욕을 해대며 대판 싸우면서 자녀들은 착하게 자라라고 하면 모순 아닌가. 정의라는 게 있고 기강이라는 게 있고 원칙이라는 게 있다고 하면,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적십자 회비 1만 원은 술집에서 먹는 소주 3병 값이다. 흔한 안주 하나에 1만 원은 넘는다. 그러니 부담되는 돈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내고 싶어야 내는 것 아닌가. 이 적십자 회비 안 낸다고 과태료, 벌금 같은 건 물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 조금 미안할 뿐이다. 조금 뻔뻔하면 어때. 모르지. 한 5년 동안 안 내고 버티면 대한적십자사 총재 자리 비었다고 연락이 올지….
2015.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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