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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굴밤나무 가지 한 조각

by 이우기, yiwoogi 2015. 8. 20.



공과대학 앞 도로에서 굴밤 열매 두 개가 맞붙은 나뭇가지 한 조각을 주웠다. 아직 떨어질 때도 아니거니와 생긴 빛깔을 봐도 떨어져 찻길에 뒹굴 정도는 아니었다. 왜 하필 어제 오후 그 시간에, 하필 경상대 공과대학 앞에 저것이 떨어져 있었을까. 나는 왜 잰걸음을 놓으면서도 굴밤 두 톨을 그냥 지나쳐가지 못하고 주워서 벤치에 사뿐히 놓고 기어이 사진을 찍고야 말았을까. 무슨 일일까. 어쩐 이유일까.

 

사랑을 나누던 남녀가 있었더랬다. 사랑은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아서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쉽사리 돌아설 만큼 매정하지도 않았다. 남자사람은 그림을 잘 그리는데, 주로 우주전함, 태권V 따위 공상과학만화영화에 나옴직한 것들을 곧잘 그렸다. 여자사람은 미신 또는 샤머니즘을 좀 믿는 구석이 있는데, 그러한 두 사람의 성격이나 취미는 묘하게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신기하기도 하지. 공교롭기도 하지.

 

햇볕 쨍한 날 팔짱 끼고 걷던 청춘남녀는 문득 하늘을 보게 되었더랬다. 남자사람은 혹시 UFO나 우주전함이나 하다못해 그랜다이저가 지나가지나 않을까 싶었던 것이고, 여자사람은 혹시 지리산 산신령이나 남해 용왕님이 해바라기하려고 나타나지나 않을까 궁금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것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굴밤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연둣빛 굴밤 두 톨이었으니, 손을 뻗어 그 가지를 꺾은 게 남자사람의 손인지 여자사람의 팔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둘은 나란히 벤치에 앉아, 한 사람은 우주전함을 생각하였고 한 사람은 산신령의 수염을 생각하게 되었다. 생긴 꼬라지를 보아하니 그럴 듯하였다. 우주전함과 산신령 수염은 가깝다면 매우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영판 딴 세상 이야기인 것이었으니 두 남녀가 필경 다툼에 이르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만한 것이었다. 남자사람은 굴밤 알을 동력으로 삼아 나뭇잎을 날개로 삼아 망망대해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전함을 그리고 있었고, 여자사람은 산신령의 허연 수염과 허연 머리와 도포자락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결국 둘은 자그마한 다툼을 끝내 수습하지 못하고 등을 보이더니 서로 콧방귀를 뀌더니 종내에는 이 귀하디 귀한 굴밤나무 가지 한 조각을 길바닥에 버리고 말았다. 오호라, 안타까운 일이로고. 남자사람은 에라 모르겠다.’하고 굳이 갈 곳도 없는데도 멀리멀리 달아나버렸고, 여자사람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자기들의 아기자기한 사랑에 훼방 놓은 저 나뭇가지를 누가 주워가는지 보려고 근처 건물에 들어가 창가에 기대어 서서 안타깝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내내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의 신발도 굴밤 두 개는 밟지 않았던 것이고,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자동차 바퀴 네 개도 굴밤 두 개는 밟지 않았다. 다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나는 0.1초가 아깝게 달려가는 중에 이 굴밤나무 가지 한 조각을 본 순간, 그 찰나의 순간에, 그들 남녀사람의 사랑과 다툼과 짧은 이별을 꿰뚫어보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근처, 아마도 남녀가 앉아있었을 그 벤치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게 된 것이다. 이로 하여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예전의 사랑하는 감정을 되찾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잘것없는 굴밤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채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창대한 꿈을 꾸었음직한 굴밤 두 톨은, 어이없게도 때도 아닌 때에 꺾어져 포도에 뒹구는 운명의 장난을 마주했으니, 얄궂은 운명에 한줄기 빛을 준다고 할까 작은 위안이라도 준다고 할까. 이렇게 사진에 찍혀 페이스 북에 올려져 뭇 사람들의 귀한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되었으니 그 영혼이 잠시잠깐이라도 웃게 되지나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2015.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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