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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술에 대하여

by 이우기, yiwoogi 2015. 6. 1.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곧장 목구멍에다 탁 털어넣는데 그들이 무슨 맛을 알겠느냐?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지, 얼굴빛이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구토를 해대고 잠에 곯아떨어져버린다면 무슨 술 마시는 정취가 있겠느냐? 요컨대 술 마시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병에 걸리기만 하면 폭사(暴死)하기 쉽다. 주독(酒毒)이 오장육부에 배어들어가 하루아침에 썩어 물크러지면 온몸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야말로 크게 두려워할 일이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시키거나 흉패한 행동은 모두 술 때문이었기에 옛날에는 뿔이 달린 술잔을 만들어 조금씩 마시게 하였고, 더러 그러한 술잔을 쓰면서도 절주(節酒)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뿔 달린 술잔이 뿔 달린 술잔 구실을 못하면 뿔 달린 술잔이라 하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 술로 인한 병은 등에서도 나고 뇌에서도 나며 치루(痔漏)가 되기도 하고 황달이 되어 별별 기괴한 병이 발생하니, 한번 병이 나면 백가지 약도 효험이 없다. 너에게 바라고 바라노니 입에서 딱 끊고 마시지 말도록 해라.”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비)

사대부가 살아가는 도리-술 마시는 법도’ (100~101)에서

 

혼자 저녁밥상을 놓고 막걸리 두 잔 마셨다. 어제 중앙시장에서 사온 메밀묵이 맛있었다. 얼굴이 조금 발그레해졌다. 며칠 전 읽은 다산 선생의 글이 생각나 다시 펼쳐 읽고 옮겨 보았다. “딱 끊고 마시지 말도록 해라는 말이 마치 아버지가 생전에 나에게 늘 하던 말처럼 귀에 쟁쟁하다.

 

나 같은 주제에 나라를 망하게 할일은 없겠지만 술 때문에 가정은 파탄시킬 수도 있겠다싶은 생각은 한다. 어쩌다 소주 한두 병 마시고 귀가한 날에 아들과 아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거나 중요한 약속을 해놓고 잠드는 수가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 밤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까마득히 잊은 채 했던 말을 또 하게 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가장의 체면이고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된다.

 

어쩌다 한두 번 그렇다면야 눈 질끈 감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요즘 들어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소주 한 병 이상 마셨다 하면 거의 그런 일이 생겨나니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기껏 10시쯤 집에 돌아온 사람이 아내에게나 아들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엎어져 잠만 잘 수 없지 않겠나. 무슨 소리든 지껄였다 하면 횡설수설이요 다음날에는 까마득히 기억나지 않으니 문제가 심각하다. 유식한 말로 알코올성치매라고 할까.

 

그러니 술을 줄여야 하고 기어이 딱 끊고 마시지 말도록 해야할 것 같다. 다산 선생이 아들에게 한 꾸지람이나 아버지가 생전 나에게 한 가르침은 하나도 어긋나지 않았다. 나 또한 4~5년 뒤부터 죽을 때까지 아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줄 말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니 오죽하겠나. 경험이 많은 어른이 경험이 얕은 젊은 세대에게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해주는 조언이자 지상명령이겠다.

 

그러니 안 따르고 배길 재간이 있을까. 다만, 양보하고 또 양보하여 딱 끊고 마시지 않는 것은 어려운 시절이니 절주에 절주를 다짐해 둔다. 오늘 같이 길고 긴 날 누구에게든 연락하여 어디에서든 한두 잔 했음직한데도 불구하고 출출한 배를 부여안고 용케도 집으로 돌아와 겨우 막걸리 두 잔으로 하루 동안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는 것만 보더라도 다산 선생의 죽비소리가 크게 울리긴 울렸나 보다. 이제 사람이 되려나.

 

2015.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