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장망혜’라는 좀 어려운 말이 있다. 한자로는 ‘竹杖芒鞋’ 이렇게 쓴다. 이 말을 처음 안 것은 고등학교 시절 ‘강병철과 삼태기’가 부른 노래에서였고, 정비석이 쓴 ≪소설 김삿갓≫에서도 본 듯하다. 알고 보니 ‘창부타령’에도 나온다. ‘대지팡이와 짚신’이라는 뜻으로 산수 유람하러 길 떠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먼 길을 떠날 때의 아주 간편한 차림새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대지팡이 하나와 짚신만 있으면 어디든 언제든 허위허위 떠날 수 있고, 실제 떠난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풍류가 저절로 나오고 노래와 술이 졸래졸래 발자국 따라 다닐 것만 같다. 죽장망혜는 담양군에서 9월 17일부터 10월 31일까지 죽녹원 일원에서 개최한 ‘2015 담양 세계 대나무 박람회’의 홍보전시관 안에서 본 말이기도 하다.
담양(潭陽)은 그렇게 다가왔다. 한 번도 못 가본 곳인데 몇 번은 가본 듯하고 그래서 언젠가 기어이 한 번은 가야겠다고 생각해 왔던 곳이다. 저녁 늦게 대충 짐 꾸리고 아침 대강 때운 뒤 내비게이션만 믿고 길을 나섰다. 그 전날 이런저런 정보를 이곳저곳에서 수집하긴 했지만 일단 부닥쳐 보자는 생각이 더 컸다. 무엇 무엇을 볼지 밥은 어디에서 먹고 잠은 어디에서 잘지 정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길바닥에서 라면 끓여먹고 노숙을 하더라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두 시간 걸려 도착한 담양은 자그마하고 오밀조밀하고 예뻤다. 차는 많았지만 따분하다거나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날씨는 더웠다.
‘죽녹원’을 거닐며 ‘하찮았던’ 대밭도 이렇게 가꾸고 모양을 내니 그럴듯한 관광지가 된다는 사실이 배울 만했고, 길마다 이름을 붙이고 나니 나그네들이 오히려 어깨를 으쓱해할 만하게 되는 것은 신기했다. 조선시대 문장깨나 날리던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 등 양반 나리들이 가사를 끄적거리며 노닐던 정자들을 한곳에다 모형으로 모아놓은 것도 볼 만했다. 처음엔 진짜 그렇게 다들 모여 있는 줄 알았다. 정자 위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건 좀 그렇지), 부채 만들기 체험을 하는 사람, 가야금을 뜯으며 창을 하는 사람들이 따가운 햇살과 약간 습한 바람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이 하나만으로 담양을 다 보았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었다.
점심을 때우고 메타세쿼이아 길을 둘러 숙소로 향했다. 메타세쿼이아 길은 아내 혼자 왕복했고 다리가 아프고 허리도 아픈데다 목마저 마른 나와 아들은 근처 커피숍에서 시간을 죽였다. 저녁으로 라면에 삼층밥을 말아먹은 뒤 관방제림(官防堤林)을 다녀왔다. 국숫집은 문을 열어놓고 있었으나 한 그릇 할 만큼 뱃속 여유는 없었다. 숙소는, 진주에서 출발할 때 담양군청 누리집에 올려놓은 여러 곳 가운데 전화를 하여 세 번 만에 인연이 닿은 곳이다. ‘가향채’(佳香寨). 향기가 아름다운 집이란 뜻이다. 과연 온갖 꽃들로 단장되어 있는 마당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져 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하룻밤 지내고 보니 그 향기는 주인 내외의 살가움과 친절함, 붙임성, 서글서글하면서도 세심함, 그리고 음식 솜씨에서 스며 나오는 것이라고 해야 옳았겠다. 찰밥과 누룽지에 맛깔 나는 반찬으로 아침밥 잘 얻어먹은 뒤, 그 값으로(주인의 요청대로) 방명록에 소회라고 할까 객창감이라고 할까 몇 글자 적어 놓고 왔다.
둘째 날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소쇄원’(瀟灑園)으로 달렸다. 출발 전날 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읽은 내용을 아내와 아들에게 설명했다. 그냥 보면 몰랐을 것들을 유홍준 교수의 해박하고 친절한 설명을 듣고 간 뒤라 대부분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가슴에도 배어들었다. 그런 곳이 소쇄원이다. 특히 알고 가야 제대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곳이 소쇄원이다. 한국가사문학관도 들렀다. 정철이 가사를 지었다는 ‘식영정’도 먼발치에서 보고 왔다. 고등학교 시절 외우다시피 하던 가사문학에 대해 새롭게 다가간 시간이었다. 국문학과 출신으로서 중3 아들에게 모처럼 아는 체하기 딱 좋았다. 송강 정철이 가사문학과 시조 등 국문학계에서 본다면 빼어난 작품을 여럿 남겼지만 상당수 작품은 임금을 향한 사모곡이라는 것, 그가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불었던 피바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아들이 듣기에 거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 살아있는 교육이니까.
참 볼 것이 많고도 많았다. 먹고 싶은 것도 많았다. 보통 ‘무슨 무슨 8경’이라고 하여 여덟 개를 겨우 맞추는데, 담양은 ‘담양 10景’, ‘담양 10味’라고 한다. 그만큼 풍부하다. 담양은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담는 커다란 그릇이 아닐까 싶었다. 대나무박물관에서 본 온갖 진귀한 공예품과 커다랗게 만든 대바구니 들을 보니 가히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이틀 동안 부지런히 돌아다녔지만 본 것보다 못 본 것이 더 많고, 맛본 것보다 맛보지 못한 것이 더 많다. 찬바람 불 즈음 다시금 시간을 내어야 할 이유이다. 전주도 그렇고 경주도 그렇지만 담양은 더욱 그렇다. 그곳에서 태어나 두세 살까지 살았던 아내의 추억과 흔적이야 찾을 수 없겠지만, 장모님의 인생이 오롯이 여울져 있을 담양을 모른 체하고 지천명을 맞이하기가 저어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덧붙여 놓고 싶다. 정철과 함께 가사문학의 쌍벽을 이룬 송순의 대표작은 ‘면앙정가’(俛仰亭歌)이다. 그의 호는 면앙(정)이다. 면앙정은 가향채에서 걸어서 20여 분, 자동차로 5분 거리여서 저녁 먹기 전 해거름에 다녀오자 작정하고 내달렸다. 5분 동안, 국문학사에서 굉장히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송순, 그의 대표작이 탄생한 정자이니 으리으리하지는 않을지라도 꽤 잘 꾸며놓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정작 면앙정에 올랐을 때는 실망감과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냥저냥 야트막한 야산 꼭대기에 흔하디흔한(적어도 담양에서는) 정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정자 앞에 이런저런 비석을 세워 기록을 남겨놓고는 있었지만, 2시간 넘게 달려간, 고교시절 죽으라 하고 외우던 가사문학에 대한 환상을 가득 안고 달려간 중년의 눈에는 ‘이런 줄도 모르고 온갖 상상을 하며 마음속에 멋들어진 정자를 그려놓고 있었나?’ 싶어 눈물마저 나오지 않던 것이었다.
또 한 가지 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8월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해 주신 나라님 덕분에 가는 길 고속도로비 5000원 정도, 죽녹원 입장료 5000원, 메타세쿼이아 길 입장료 2000원, 대나무박물관 입장료 5000원 아꼈다. 소쇄원과 한국가사문학관은 15일에 갔는데 입장료를 받았고 대나무박물관은 역시 15일에 갔는데 무료였다.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1만 7000원 정도 아꼈다. 소고기보다 돼지고기를 훨씬 좋아하는 덕분에 소고기떡갈비는 먹어보지 않았고 관방제림 근처 즐비한 국숫집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가을에 꼭 가볼 요량이어서 그나마 아쉬운 마음을 달래본다. 쥘부채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마 햇살을 가리는 것은 고사하고, 정말 어떤 모습으로 사진에 찍혔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돌아온 뒤 웃음 지으며 해보는 생각이다. 아내와 아들은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지 궁금해지는 것 또한 여행이 끝난 뒤에 두고두고 남게 되는 여운이자 행복이다. 2015.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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