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얼굴은 빨갛게 익어 있었다.
7월 말 어느 토요일 오후 5시쯤 본가에 갔다. 어머니는 금요일, 토요일 이틀 동안 사천 어디 바닷가에 가서 재첩과 고둥을 잡아 왔다. 사천공항 뒤쪽 어딘가 보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이라고 했다. 그 일은 일흔다섯 연세에는 무리다 싶어 군담을 했더니 그 동네 출신 친구가 가자고 해서 재미삼아 갔다 왔다고 했다. 그렇지만 잡아놓은 재첩과 고둥을 보니 꼭 재미로만 잡은 건 아닌 듯했다. 이틀 동안 한여름 땡볕을 받아가며 바닷물 속에 들어앉아 발과 손을 더듬어 재첩을 잡고 고둥을 찾았을 것이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모자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물속에 들어앉은 몸은 시원했을지 모르지만 머리와 얼굴 그리고 등은 얼마나 따가웠을까. 그리하여 잡은 재첩과 고둥을 이고 들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탄 뒤 진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다시 20분 걸어서 집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것으로 끝인가. 개흙을 머금고 있는 재첩을 씻고 해감하고, 고둥 역시 마찬가지 공정을 거쳐 삶았을 것이다. 고둥 껍데기의 오돌토돌한 곳에 묻은 개흙은 쉽게 씻기지 않는다. 재첩은 삶은 뒤 껍데기를 하나하나 주워내었다. 날은 덥고 얼굴은 화끈거리고 국은 뜨겁고, 그 모든 수고로움을 감수하고서야 재첩국이 완성되었고 삶은 고둥도 먹을 만해졌다. 어머니 연세에 쉽지 않았을 일을 마다않고 오로지 정신을 집중하게 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토요일 오후에 갔을 때 금요일 잡은 것은 먹기 좋게 해 놓았고, 토요일 잡은 것은 연신 씻고 있었다. 나는 감히 그것을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섰다가 일손을 도우며, 다음날 또 가려는 듯한 말씀을 딱 분질렀다. “누가 이런 것 좋아한답니까?” “절대 가지 마이소!” 조금 서운한 듯한 표정도 잠시, “알았다, 인자 안 갈 끼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고둥을 빨아 먹었다. 단단한 뒤꽁무니를 펜치로 자른 뒤 입으로 쪽 빨아 당겼다. 물컹하면서도 고소한 고둥의 살이 입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10개 먹는 데 10초도 안 걸렸다. 그러고서는, 저녁은 어디 가서 맛있는 것 사 먹자고 하였다. 보통 때 같으면 “너거 돈 많이 쓰면 되겠나?” 하는데, 이날은 낮 동안의 노동에 기운이 적잖이 빠졌는지 “그러자.”고 하여 장어구이를 먹으러 갔다. 나는 소주와 맥주를 번갈아 마셨다. 그러고서 끓여놓은 재첩국을 넉넉히 담아 집으로 왔다.
아내는 소풀(부추)을 잘게 썰고 소금 간을 하고 매운 고추까지 넣어 일요일 아침, 일요일 저녁, 월요일 아침까지 살뜰히 챙겨 주었다. 덕분에 지난 한 주 동안 마신 술이 해독되는 느낌이다. 특별한 맛은 아니다. 그냥 약간 밍밍하고 조금 고소하고 아주 조금 감미롭다. 하지만 목을 넘어가는 재첩국과 알갱이들은 반드시 내 몸에 필요한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어머니와 아내의 사랑 아닌 게 하나라도 있을까마는…. 그렇게 주말을 보냈다. 2015.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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