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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실망스러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상선약수’ 액자

by 이우기, yiwoogi 2015. 8. 10.



큰형이 아파트를 사서 이사할 때 나는 이름 높은 서예가로부터 不盈科不行’(불영과불행)이라는 글을 받아 액자에 넣어 선물했다. 나도 그렇고 큰형이나 조카들이 이 말 뜻을 제대로 알고 깊이 음미하려면 공부가 많이 필요할 것이다. 이 말은 신영복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강의를 읽다가 알게 되었는데, 원래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뜻을 풀어보자면, “물은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반드시 다 채운 다음에야 앞으로 흘러간다.”는 말이다. 지름길을 찾지 않고 정도를 걸어 앞으로 나아가면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이 말과 비슷한 다른 말을 찾아보면 上善若水’(상선약수)가 있다. 이 말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글귀이다. 뜻은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고, 모든 이가 싫어하는 자리로 흘러간다.(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는 구절로 이어진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이 여러 곳에 써 붙여 놓고 마음가짐을 가다듬고는 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좋은 말이다.

언젠가 출근길에 삶을 배우다라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 남강 물이 흘러 내려간다. 비 많이 오면 많은 물이 빠르게 흐르고 비 안 오면 적은 물이 느리게 흘러간다. 물은 뒤의 물이 앞의 물을 절대 앞서나가지 않는다. 앞물이 빠르거나 느리거나 묵묵히 뒤따를 뿐이다. 물은 스스로 그늘을 만들지 않아 앞물과 뒷물이 다투지 않는다. 그저 말없이 아래로 밑으로 하염없이 흐를 뿐이다. 그래서 물은 물이다. 그렇게 남강 물을 굽어보며 삶을 배운다.”라고 했다. ‘불영과불행상선약수를 보고 듣고 흉내랍시고 내어 본 것이다.

반기문 국제연합(유엔) 사무총장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上善若水라고 쓴 액자를 선물한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를 두고 호사가들이 물과 노자, 도덕경, 정치, 대통령 등등의 말을 잇대어 붙여 해석하고 번역하느라 호들갑을 떨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 글귀를 전달한 것은 나름대로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 뜻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치자. 또 반기문 사무총장은 이 액자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 이름을 奧巴馬’(오파마)라고 썼다. ‘오파마한자와 관련해 반기문 사무총장은 심오하고() 친근하며() 말처럼 힘이 넘치는() 사람이다.”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나는 좀 웃었다.

대한민국 출신 유엔 사무총장이 하필이면 왜 중국글자로 액자를 만들어 선물했을까 하는 데 마음이 한참 동안 머물렀다. 이대로 국어문화운동실천협의회 회장님께서 페이스북에 이에 대하여 먼저 문제를 제기하신 덕분이다. 언론에서 반기문 총장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액자를 선물했다고 보도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대로 선생님 아니 계셨으면 이 사실도 모르고 넘어갈 뻔했다. 이대로 선생님은 이 찍그림을 보는 나는 부끄럽다. 반기문 사무총장 의식수준에 실망하고 분노한다. 에라이, 못난 사람아! 그만한 자리에서 그런 생각밖에 못한단 말이냐?”라고 일갈하셨다. 미국 대통령에게 주는 액자이니, 차라리 영어로 쓰든지.

우리나라에는 한글이 있다. 우리말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세계 으뜸 문자인 한글이 있다. 국제연합 산하 전문기구의 하나인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에서 문맹퇴치에 기여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하는 상 이름은 킹 세종 프라이스’(세종대왕상)이다. 미국의 세계적 인류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 , 에서 한글에 대해 한국인의 천재성에 대한 위대한 기념비라고 극찬했다. 영국의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 존 맨은 저서 알파 베타(Alpha Beta)에서 한글을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했고,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은 한글을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 가운데 하나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한글로 상선약수라고 써서 줄 수도 있었고, ‘물처럼 살자라고 써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흐르는 물처럼이라고 써도 좋고 물의 지혜를 배우자라고 해도 나쁘지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반기문 사무총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는 며칠만 머물고 나머지 긴 세월 동안 외국에서 돌아다니다 보니 우리말 우리글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다.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데 대한 개념이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유엔 사무총장 자리에 올랐으면, 자기의 모국과 모국어에 대하여 남다른 애정과 관점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고전에는 우리가 따라 배우거나 마음에 깊이 새겨 둠 직한 좋은 말이 많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등을 읽거나 번역해 놓은 책을 보면 그걸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많은 분들의 집이나 사무실에는 그것을 한자로 멋들어지게 써서는 고급액자로 만들어 걸어놓곤 한다. 좋은 일이다. 고전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것은 권장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장삼이사끼리 그러할 때는 괜찮지만, 반기문 사무총장처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딴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에게 선물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만일 반기문 사무총장이 한글로 된 액자를 만들어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했더라면 자랑스러운 우리 한글이 전 세계에 그대로 전해졌을 것 아닌가. 지나친 우려인지 모르지만, 이 사진을 보는 다른 나라 식자들이 반기문 사무총장은 중국 사람인가.’라고 생각할까 걱정된다.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걱정스럽고 안타깝다. 실망스럽다2015.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