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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아들의 배신…그래도 행복하다

by 이우기, yiwoogi 2015. 5. 18.

몸이 으슬으슬했다. 비 탓이다, 라고 생각했다. 우기가 비를 탓하다니.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 결석을 알렸다. 집에 오니 학교를 마친 아들이 컵라면 비슷한 걸 먹고 있다. 그걸 먹고 학원에 가면 일곱 시쯤 온다. 집에 오면 다시 밥을 먹을 거란다. 모처럼 마음이 동했다.

 

첫 번째 밥을 안쳤다. 보랏빛이 배어날 만큼 흑미를 넣었다. 쌀을 깨끗이 씻었다. 30분 정도 불렸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지. 나머지는 압력밥솥에게 모든 걸 맡겼다.

 

두 번째 양파를 썰었다. 양파 향이 코를 자극한다. 눈물이 찡 난다. 개의치 않는다. 호박도 썰고 버섯도 썰었다. 기름을 두르고 낮은 불로 볶았다. 매실즙을 넣고 참기름도 넣었다. 고춧가루를 뿌리고 참깨도 좀 뿌렸다. 다진 마늘을 좀 많이 넣었다. 맛은 별로다. 나는 먹겠는데 아들은 왼고개를 틀 것 같다.

 

세 번째 냉장고를 뒤져 돼지고기 남은 것, 소고기 남은 것을 꺼냈다. 전자레인지에서 해동하여 잘게 썬 뒤 구웠다. 볶았다고 할까. 천일염을 조금 뿌렸다. 고기도 가장 맛나게 먹히고 싶을 테니까. 노릇노릇하게 익혔다.

 

네 번째 배추김치를 볶았다. 역시 매실즙과 참기름을 조금 넣었다. 낮은 불로 김치의 가장 두꺼운 부분까지 말랑말랑해지도록 잘 익혔다. 김치 냄새가 주방 근처에 배었다. 배가 고팠다. 눈도 좀 침침해졌다. 익은 김치를 하나 먹어 보니 입 안에 침이 확 고인다.

 

다섯 번째 두부를 맞춤하게 잘랐다. 두부가 딱딱해지지 않도록 살짝 데우다시피 구웠다. 두부는 우리집 냉장고에서 없어지지 않는 필수 반찬이다. 주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에 넣어 먹는데, 간혹 그냥 구워 먹기도 한다. 이럴 땐 간장 맛이 중요하다. 아무튼 그렇게 3종 세트가 완성됐다. 말하자면 두부김치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준비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보통 75분 전에서 710분 사이에 온다. 아침에 먹고 남은 된장찌개는 바로 데워 내어놓을 참이었다. 녀석이 싫다 하지 않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학원 가기 전에 먹은 컵라면 때문에 밥 생각이 없다고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한다. 오늘따라 친구들과 군것질을 했다며 밥을 아예 안 먹을 거라고 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도 한다. 그렇게 잠시 동안 아들 기다리는 재미에 푹 빠진다. 그런 나를 내가 본다. 행복하다.

 

이윽고 아들로부터 전화가 온다. 읽던 책에서 눈길을 떼고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오늘 모처럼 학원 친구들하고 노래방 가서 딱 30분만 노래 좀 부르고 갈게요.” “야 이놈아, 애들이 무슨 노래방을 가?” “그런 게 있어요.” “, 네 주려고 밥하고 반찬 만들어 딱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드세요. 30분만 놀다 갈게요.” 마지막에 야이, 배신자야!”라고 한 말은 내 전화기에서 저쪽 전화기 중간 어디쯤에 걸려버렸다. 제길.

 

에라, 모르겠다. 컨디션도 별로인데 담가놓은 술이나 한잔 해보자. 유리잔 가득 붓고 얼음을 동동 띄운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돈다. , 어때? 이런 것도 재미지, 라며 자기 최면을 건다.여름이 오는지 봄이 가는지 창밖엔 비가 그치지 않는다. 나중에 돌아온 아들은 식어버려 맛이 반감되긴 했지만 내가 먹다 남은 반찬으로 밥 한 그릇을 알뜰히 맛있게 비운다. 그래서 행복하다.


2015.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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