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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즐거움

서정홍 형의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

by 이우기, yiwoogi 2015. 5. 13.



서정홍 형을 만난 건 진주에서 우리말 우리글 살리는 모임을 열심히 할 때이니 1994년쯤이다. 형은 상평성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성당에서 모임을 했다. 형은 늘 웃었다. 말은 느리게 했다. 심각한 토론을 할 때도 여유가 있었다. 2년 남짓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했다. <우리말 우리글>이라는 회보 만들어 회원들에게 보내고, 나중에 책도 내었다. 그러고 나서 모임을 좀더 키웠는데 어찌된 일인지 잘 안 되었다. 다들 먹고살기가 더 바빠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집 <윗몸 일으키기>를 낸 것은 모임이 한창 잘 될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시를 교정해 드렸다. 신문사 교열기자의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형의 부탁이긴 했지만, 나는 많이 미안했다. 시라는 것이 반드시 문법에 맞아야 하고 어법에 어긋나면 안 되는 건 아니잖은가. 내가 그걸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나는 일단 교정을 해드렸고 형은 대부분 받아들였다. 그러고서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저 먹고살기 바빠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 시집 <58년 개띠> <아내에게 미안하다> <우리 집 밥상>과 산문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 노릇은 해야지요> 들이 나왔다. <경남도민일보>에 실은 글을 몇 번 읽은 적도 있다. 한두 번 전화 통화를 했는데 무슨 일이었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간혹 형을 생각할 때면, 어디에 계시건 <윗몸 일으키기>를 쓸 때의 그 마음과 정신으로 살 것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말 우리글을 살리듯 우리 이웃과 우리 땅을 살리는 일을 할 것이라는 믿음에도 변함없었다. 어디에 계시건 문득 찾아가면 20여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고, 문득 전화하면 하하하하고 웃음부터 터뜨릴 것 같다. 그런 형이다.

 

오늘 서정홍 형을, 형이라고 부르자니 우리는 그동안 너무 적조했다. 선배라고 부르기도 난망하다. 시인님이라고 부를까. 오늘 진주문고에 갔다. 서민 교수의 <집 나간 책>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형의 시집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어느 신문에서 시집이 나왔다는 기사를 봤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집어 들고 몇 장을 넘겼다. 시는 여전했다. 맑고 시원했다. 깔끔하고 날카로웠다. 세상을 보는 형의 눈은 시력 1.5 이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몇 수를 사진으로 소개한다.

 

시인을 소개해 놓은 책날개를 보니, 형은 그 사이 종이 위에 글자로 농사를 지어 놓았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닳 않는 손> <나는 못난이> <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 <농부 시인의 행복론> <부끄럽지 않은 밥상> 들을 지어 놓았다. 맛있는 밥이고 반찬이고 국이다. 형이 지어 놓은 농사를 다 얻어먹으려면 제법 노력을 기울어야하게 생겼다.

 

농사를 지으면서 도대체 어느 시간에 이렇게 푸짐하고 넉넉한 사랑과 삶의 향연을 펼쳐놓았을까. 어쩌면 형은 합천 어디어디에서 농사짓는다고 세상에 소문내어 놓고서는, 풀들과 나무들과 흙과 감자들과, 그리고 소들과 염소들과 개들과 고양이들과,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이들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루 종일 나누고,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들만 골라 다시 세상에 글자로 내어놓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형을 농사꾼이라고들 알고 있다.

 

형이 스스로 모름지기 자연 속에서 자연을 따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다는 걸 깨닫고, 농부가 되었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참되게 바뀐다고 믿으며, 글쓰기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라고 소개하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아무튼 반갑고 고마운 만남이다. 형이 고맙다.


2015. 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