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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즐거움

좋은 책을 고르는 손쉬운 방법

by 이우기, yiwoogi 2015. 4. 7.

거실에 앉아 가만가만 듣는다.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이 소리는 음성 같기도 하고 음향 같기도 하다. 봄비소리 같기도 하고 아기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파도소리 같기도 하다. 때로는 천둥소리 같다. 죽비소리처럼 들리는 날도 많다.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에 잠기면 그 소리는 귓가에 머문다. 귓가에 머물던 소리는 머릿속으로 파고들고 가슴을 뒤흔든다. 아릿하고 저릿한 그 무엇이 은근히 솟아오른다.

 

그 소리는 무엇인가. 귀신의 목소리다. 어떤 귀신인가. 동서고금의 귀신이다. 관군에 쫓기던 <임꺽정>이 낭떠러지를 만나 끝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뛰어내리면서 지르는 외마디 비명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하대치가 먼저 스러져간 동지들을 그리워하며 혁명을 꿈꾸며 <태백산맥>을 뛰어다니는 거친 숨소리다. 진수와 성찬 부부가 트럭에 온갖 신선한 반찬거리를 싣고 전국을 누비고 다니며 <식객>을 찾을 때 내지르는 호객소리다. 왜군의 조총을 피해 백성을 버리고 도성을 떠나던 <선조>의 눈물도 묻어나고, “오호라,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외치던 <정조대왕>의 통곡소리이기도 하다.

 

말을 살려야 겨레가 산다는 구호를 내걸고 평생을 우리말과 글을 갈고 다듬으며 살다 가신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글 바로쓰기> 가르침도 들리고,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일본까지 유랑하며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로 문화유산을 가르치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에밀레종 소리도 들린다. 이제는 고인이 된 박완서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내게 묻고, 제임스 미치너는 <소설>이 탄생하는 과정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백범일지>에 갇혀 있던 김구는 김별아의 <백범>으로 부활하였고, 망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헤던 윤동주는 <별을 스치는 바람>을 타고 되살아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한다.

 

사서삼경은 <마지막 강의>를 앞둔 신영복 교수가 새롭게 <강의>했고, 김용옥은 <사랑하지 말자>며 목청을 높인다. 구수한 누룽지 같은 사투리가 입에 착착 감기는 충청도말은 이문구의 손끝에서 <관촌수필> <우리 동네>로 전국어가 되었다. <혁명과 우상>에서 김형욱의 말로를 사실적으로 그려 박정희 시대의 비극을 만천하에 폭로했던 김경재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버트런드 러셀의 예리하고 차분한 통찰에 의하여 <서양철학사>의 여러 페이지를 장식했고, 그보다 더 앞선 신화의 시대는 검은 눈의 신화학자 이윤기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 로마 신화>로 되살아났다. 그러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의 신화라고 할까, 그리스 철학이라고 할까.

 

거실에 앉아 있으면 책들의 음성이 들려온다. 책 속 주인공의 숨소리인지 책 쓴 작가의 목소리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책을 살 때의 어떤 다짐이나 각오가 음성화하는 것인지, 나에게 책을 준 이들의 어떤 바람이 청각화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책은 항상 거기에 있다. 거기에 있으면서 자꾸만 자기에게 손길을 달라 주문한다. 한번 읽은 책은 그러니까 한번 더 읽어 달라 하고, 한번도 읽지 못한 책은 그러니까 한번은 읽어야 하지 않겠느냐 묻는다.

 

언제인지 일일이 기억할 수 없고 어떤 까닭인지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지만, 책들은 제각기 나름의 이유를 안고 우리집 거실에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열 권 중 예닐곱 권은 좋은 책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양서는 한번은 읽어야 할 책이고, ‘양서니까 되풀이하여 읽어도 되지 않겠느냐 싶어진다. 고전도 있고 신간도 있다. 소설도 있고 시도 있고 역사책도 있다. 큰 출판사에서 낸 책도 있고 지방의 작은 출판사에서 낸 책도 있다. 유명한 작가의 책도 있고 지은이가 누군지 통 모르겠는 책도 있다. 아는 작가의 책도 여럿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사연을 들려주려 한다. 자신이 꼭 읽혀져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을 역설하려 한다. 깊은 밤, 또는 한가한 주말 거실에 앉아 있으면 책들이 내뿜는 음성인지 음향인지 모를 가느다랗고 굵은 소리가 머리를 맴돈다. 그 수많은 소리 가운데 한 가닥만 딱 붙들어 쥐면, 책 읽기는 시작된다. 그러니 얼마나 쉬운가.

 

2015. 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