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우물가에서 놀다가 잘못하여 우물에 빠질 급박한 상황이다. 그것을 본 사람이라면, 아이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고 손길을 내밀어 구해준다.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이의 부모가 부유한지 가난한지, 나와 어떤 관계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순간적 위험에서 자기도 모르게 아이부터 구해놓고 보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이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인(仁)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누구든 남의 어려움, 위험, 고통, 불행 등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난다.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자는 사람에게 4가지 마음이 있다는 단서를 말하는데,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그중 첫 번째이다. 맹자는 ‘무측은지심 비인간’(無惻隱之心 非人間)이라고도 했다. 측은지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서해 페리호 침몰, 대구 지하철 화재, 부산 구포역 열차 전복, 화성 씨랜드 화재 사고 같은 지난 세기 엄청난 비극은 말할 것도 없고 마우라 리조트 붕괴, 세월호 참사 같은 사고를 보면 안타깝고 슬퍼 눈물 흘리게 되는데, 그것이 측은지심이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보고 들으며 혀를 차거나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속울음을 삼키는 일이 많다.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일을 보면 저절로 고개 숙여진다.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명복을 비는 게 인지상정이다. 사고를 당한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 따지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행동을 함으로써 장차 내가 그의 가족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그 반대도 성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뜬금없이 해본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 교도소에 가게 생겼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 또는 죄가 큰지 작은지 따져보기 전에 안타깝게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놈 참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없으란 법이 없다.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안타깝다는 생각도 없진 않겠지만 정말 속으로는 ‘잘됐다!’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측은지심을 가진 인간이라 하더라도, 아니 오히려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대단히 불행한 일을 두고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런 경우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기 때문이고 그가 어떤 행동과 말을 해왔는지 알기 때문이고 그가 살아남아 하게 될 어떤 많은 일들보다 차라리 앞으로 어떤 일도 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런 일은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그렇고 그런 평가를 받는 사람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갖고 있으며 인격적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고 이는 신성불가침의 천부인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인격을 제대로 존중해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만일 그가 물에 빠져 죽을 지경이거나 스스로 목숨을 내던질 지경에까지 몰렸다 하더라도 일부러 모른 척해 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 인물이 의외로 많다. 굳이 몇몇 사례를 들어보자면 정치인들이 많이 들어가겠다. 훌륭한 정치인도 많지만, 국민이나 나라의 앞일보다 자신의 이익과 당리당략에 얽매인 정치인이 많다. 나중에 생을 마감할 때는 선한 얼굴과 마음으로 돌아올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의 모습을 봤을 때는 왼고개를 틀어버리고 싶은 정치인이 많다. 각종 탈세와 불법 뇌물, 불법 정치자금을 대어주면서 개발이익을 얻는 일부 재벌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노동자를 조선시대 하인 부리듯 하면서 호의호식하는 이들을 보면 그들이 먹는 밥과 반찬이 나중에 지옥에 가서 먹게 될 똥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수사를 받다가 어찌어찌하여 사망하면 그 수사는 종결된다고 한다. 죽은 사람에게까지 죄를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서 수사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 때문에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던 사람도 혀를 차며 “불쌍한 놈!”이라고 한마디 뱉고는 만다. 그것도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욕을 퍼부어줘야 속이 풀릴 만한 짓을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멀리에 가까이에. 그런 감정은 측은지심의 반대편에 있는 마음일 텐데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걸 ‘증오’ 또는 ‘저주’라고 할 수 있을까. 2015.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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