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때나 직장 생활할 때 중산리, 백무동, 대원사, 다솔사 같은 데를 자주 갔다. 큰 산 등산로 입구나 큰 절 밑에는 동동주와 도토리묵 같은 걸 파는 가게가 많다. 산에 오르기 전에 한 뚝배기 한다. 자동차에 기름 넣듯 몸에 주유하는 것이다. 내려올 땐 하산주 한잔한다. 안주 도토리묵은 그 산에서 주운 도토리로 만들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동동주 페트병 한 병을 더 산다. 요즘은 잘 모르겠는데 90년대 초중반에는 한 병에 5000원 했다. 동동주 한 뚝배기와 도토리묵 한 접시 깨끗이 비우고 일어나면서 한 병 더 달라 하면 주인은 의아해한다. 집에 가져가서 아버지 드릴 것이라 하면 웃으며 1000원을 깎아주곤 했다. 차안에서 냄새를 피워가며 동동주 한 병을 집으로 안고 가는 마음은 햇살이었다. 호주머니 여유가 있는 날엔 도토리묵도 한 접시 비닐봉지에 싸가기도 했다.
캄캄해진 뒤 동동주 한 병을 들고 대문을 열 때면 괜스레 기분이 좋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환하게 웃으며 방문을 열어 술병부터 반갑게 받아들 아버지 얼굴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라서이다. “지리산에서 산 동동줍니다.”라는 말 이외엔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라 배가 부른데도 대접 갖고 오라 하여 기분 좋게 쭉 들이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도 마주앉아 기분 좋게 한 모금 마시곤 했다.
비싼 술 아니고 귀한 술 아니라도 흡족해 하던 모습, 이젠 영원히 뵐 수 없다. 어딜 가든 진귀한 먹거리들이 쌔고 쌨지만 선뜻 사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동동주, 막걸리만 해도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는 보약보다 좋은 것을 쉽게 살 수 있지만 본체만체한다. 혼자 먹을 생각을 하면 재미가 없어서다. 이건 어디서 나는 무슨 술인데 어디에 좋고 저건 또 어디에서 막걸리 장인이 만든 건데 어디에 좋고 이런 말을 해드리며 마주앉아 한 사발 들이켜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동동주, 막걸리 냄새만 맡아도 그런 생각이 난다. 도토리묵이나 파전, 명태찜 같은 안주 놓고 술 마시는 장면만 봐도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나고 들다 보면 가슴 한 구석이 아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버지, 지리산 물로 만든 동동주 참 좋아하셨는데…. 요즘은 동동주나 막걸리를 무덤에도 붓지 못하게 한다. 멧돼지가 무덤을 판다고. 그래서 봄 햇살 엷게 퍼지던 4월 어느 날 오후 소주 두 잔 부어드리고 왔다.
텔레비전에서 전국 유명 막걸리, 동동주 특집을 방송한다. 페이스북을 보니 어디에선가 동동주 먹고 마시는 사연들이 널렸다. 조용히 문 닫고 입 닫고 눈 닫고 밤을 보내고 싶다. 동동주 냄새만 맡아도 그리워지는 것을…. 2015.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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