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에서 중산리 쪽으로 떨어진 빗물은 덕천강을 거쳐 진양호에 이르고, 마천 쪽으로 떨어진 빗방울은 경호강을 지나 진양호에 다다른다. 진양호에 도착했다고 해도 경호강물과 덕천강물이 완전하게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대개 덕천강물은 수곡 언저리에 머물다 사천 쪽으로 빠져나갈 것이고 경호강물은 아시아호텔 근처를 더듬다가 진주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나중에 남해 바다에서 만나게 될까, 짐작해 볼 뿐이다. 천왕봉에서 불과 몇 미터 이쪽저쪽으로 떨어졌을 뿐이겠지만 그 빗물이 지나는 곳과 당도하게 되는 곳은 차이가 많이 난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난 사람도 자라고 살아가는 과정은 제각기 다르다. 100명이 살면 100가지 삶이 있고, 1000명이 태어나면 1000가지 다른 인생이 있다. 생각도 다르고 말씨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다. 5134만 2881명이 사는 우리나라에는 5134만 2881가지 생각이 있고 행동이 있고 삶이 있다. 천왕봉에 떨어진 5134만 2881개 빗방울이 각자 자기의 강을 이루어 흐르다가 자기 호수에 모였다가 자기 바다로 가게 된다. 강물은 흘러가면서 잠시 만나기도 하고 한동안 함께 흐르기도 한다. 언뜻 보기엔 하나의 강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깨동무하며 나란히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섞여 흐르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강물은 앞을 막아선 커다란 바위를 부수며 힘차게 흐른다. 어떤 강물은 산을 깎고 언덕을 깎으며 더디 흐른다. 어떤 강물은 논과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흐른다. 어떤 강물은 한동안 머물며 물살이들이 알 낳을 여유를 주며 흐른다. 어떤 강물은 무엇이든 자꾸 실어 나르며 흐른다. 그리고 어떤 강물은 아예 흐르기를 포기하고 한곳에 머무르다 썩어지기도 한다. 강이길 포기한 것이다. 이런 강물 저런 강물 모두 제각기 자기 삶이고 인생이어서 누굴 탓하지 않고 무엇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저 아래로 흐르고 밑으로 스며들 뿐이다. 나중에 바다에서 만나지면 반갑기는 하겠지만 못 만난다 한들 어쩔 수 없다.
어떤 인생은 제 잘난 맛에 산다. 우쭐거리고 거들먹거리며 산다. 남을 업신여기고 억누르며 산다. 어떤 인생은 남을 헐뜯고 비난하며 산다. 최대 무기는 거짓말과 인신공격이다. 토론이나 논쟁과 담 쌓고 산다. 어떤 인생은 못난 것을 감추며 산다. 뒤로 숨고 꼬리를 내리며 산다. 고개를 숙이고 주눅 들어 산다. 어떤 인생은 제 잘난 것을 감추며 산다. 크게 말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인데도 친구가 모여든다. 굳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간다. 어떤 인생은 나보다 남을 위하며 산다. 입보다 손이 부지런하고 혀보다 발이 더 부지런한 삶이다.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늘 함께한다. 이런 인생 저런 인생 모두 자기 인생이고 삶이다.
강물은 이런 강물과 저런 강물이 제멋대로 흘러도 괜찮다. 인생은 이런 인생과 저런 인생이 제멋대로 살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인생에게는 세상에 인격이 고매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줘야 한다. 남을 헐뜯고 비난하며 사는 인생에게는 논리로 설득하기보다 차라리 매운 주먹맛을 보여줘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못난 것을 감추며 사는 인생에게는 자신감과 자기긍정의 힘을 좀 보태줘야 할 것이다. 제 잘난 것을 감추며 사는 인생과 남을 위하여 사는 인생은 이런 것마저 짊어져야 한다. 비록 천왕봉 이쪽저쪽 몇 미터 차이로 인하여 아주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지언정, 그것이 짐승이나 돌이나 물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기에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인생 저런 인생은 잠시 만나기도 하고 한동안 함께 흐르기도 한다. 언뜻 보기엔 다정한 사이로 보이기도 한다. 어깨동무하며 나란히 걷기도 하고 마주앉아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흐르다 썩고 말 인생, 산과 언덕을 깎아가며 흐르는 인생,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 인생 따위에게 인정을 베풀 겨를은 없다. 곁을 내어주면 맑은 물도 썩게 하고 물살이들이 알 낳을 자리마저 없애려 들 게 너무나 빤하니까. 단호함이 필요한 까닭이다. 2015.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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