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선가 사이렌이 다급하게 울렸다. 민방위훈련이 아니었다. 불자동차나 앰뷸런스 소리도 아니었다. 후다닥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항상 거기 있던 잔디와 나무와 도로와 건물은 온데간데없고 바다가 보였다. 바다라고 여긴 건 파도가 맹렬하게 쳐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강이었다. 남강인 듯했다. 촉석루처럼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멀리 천수교로 보이는 다리도 보였다. 강물의 파도는 태풍에 얹힌 비구름 같았다. 거칠고 억셌다. “돌격 앞으로!”하는 장병 같았다. 누군가 “쓰나미다!” 소리쳤다. 하지만 지진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강가에는 빨래하는 사람도 있고 낚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한 스웨터를 입은 사람도 있었고 어떤 아낙은 흰옷을 입고 수건을 머리에 얹고 있었다. 처음엔 한두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강 가운데 섬에도 사람이 보였다. 아이도 있었고 어른도 있었다. 먼저 섬에 있던 사람이 쓰나미에 휩쓸려 물속으로 스며들었는데, 허우적거리지도 않았고 살려달라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신문종이가 물에 젖어들 듯 그렇게 물에 둥둥 떠서 파도를 타고 있었다. 빨래를 하던 사람도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렸다. 그들 역시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지 않고 그냥 맥없이 강물 파도에 젖어들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강변에선 낚싯대를 드리우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파도는 그들을 집어삼키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갑갑한 상황이었다.
소리를 질렀으나 소리는 허파 속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헉헉 하는 거친 숨소리만 나왔다. “도망쳐!”라고 외쳐야 하는데 헛헛 하는 바람 새는 소리만 나왔다. 드디어 파도는 낚시꾼도 집어삼켰다. 수면은 점점 높아져가고 있었다. 촉석루가 물에 잠길 판이었다. 우리도 도망가야겠는데 이제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였을까. 촉석루보다 높은 곳이었을까, 촉석루보다 먼저 파도의 희생양이 될 것이었을까. 둘러봐도 모르겠고 물어볼 데도 없었다. 동방호텔 근처나 진주교 근처였던 것 같은데, 도무지 모르겠는 상황이었다. 난처한 상황이었다.
꿈을 꾸었다. 깨고 나니 그게 꿈이었지만, 정말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엄청난 자연재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상황이었다. 깨고 나니 개꿈이지만, 정말 명재경각의 상황,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건 무엇의 징조일까, 무엇의 전조일까.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보지만 그럴수록 무지개빛 옷 입은 사람이 종이처럼 파도에 스며들던 장면만 또렷해질 뿐이다.
2015.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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