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밥을 먹고 내는 힘’이 밥심이다. 불변의 진리다. 아니다. 요즘은 밥심 아니라도 햄버거심, 파스타심, 라면심, 고기심, 햇반심으로 살고, 놀라워라, 콜라심으로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대개 젊은 사람들이겠지. 한국 사람 아니라도 밥심으로 사는 겨레도 당연히 있겠지. 그래도 맛있는 밥을 먹으며, 그 속에 섞인 돌을 씹었을 때 인상을 부리며 에이 퉤퉤 해 놓고는 그 돌 냄새마저 구별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어쩐지 서로 통하는 게 있을 것이다. 밥과 돌이 통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무슨 말인가.
벼농사를 지어 가을걷이를 하고 타작을 하면 나락을 얻는다. 나락은 벼다. 나락을 방아 찧으면 쌀을 얻고 쌀은 밥이 된다. 아버지는 말했다. “한자 쌀 미(米)를 봐라. 八과 또 八과 十을 모은 것이다. 쌀이 사람 입으로 들어오자면 농부의 발길, 눈길, 손길이 여든여덟 번은 거쳐야 하는 것이다.” 과연 맞는 말이다. 농사를 직접 지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논두렁ㆍ밭두렁 나가는 수레ㆍ지게 따라다니며 곁눈질로 ‘겪었다’고 할 만한 것만 해도 여든 번은 될 터이다.
중고등학교 때 밥 안치느라 고사리 손으로 쌀을 일고 있노라면 어른들은 “쌀 한 톨도 버리지 마라.”고 말했다. 밥그릇 시울에 묻은 밥알 하나라도 허투루 버리지 말고 깔끔하게 긁어 먹으라고 다그쳤다. 그럴 땐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고색창연한 말도 덧붙이곤 했다. 그만큼 귀한 것이 쌀이고 밥이다. 아침밥을 거르면 허전함을 넘어 머리회전이 안 되고, 두 끼니 정도를 쌀밥 아닌 분식이나 고기로 때우면 속이 니글거려 도대체 견딜 수가 없다. 밥이란 그런 것이다. 밥 타령이 아니다.
한국 사람이니 쌀밥을 챙겨 먹는 건 당연하다고 하여도, 밥 속에 숨어 있던 돌을 씹어 본 경험까지 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벼를 베어 논바닥에 가지런히 뉘어놓고 마지막 은혜로운 가을 햇살을 며칠 더 쏘이곤 한다. 타작마당에 천막을 펼쳐놓고 탈곡기를 돌려 타작을 한다. 탈곡기에 손이 빨려 들어가 다치는 일도 왕왕 벌어지곤 한다. 볏단을 탈곡기에 먹여 낟알이 죄 떨어졌다 싶으면, 어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볏단을 휙 던지는데, 볏단을 받아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 역할을 맡은 우리는 그 볏단 밑둥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기도 한다. 타작이 끝난 벼는 가마니에 담겼다가 동네 방앗간으로 가서 이리저리 조리돌림을 당한 뒤 쌀이 되어 우리집 뒤주로 돌아온다.
자, 그 쌀로 밥을 지으면 얼마나 맛있겠는가. 농부는 제 스스로 지은 쌀을 누구보다 먼저 밥으로 먹을 권리가 있다. 얼마나 황홀한 순간인가. 그러나, 아뿔싸! 새벽 농사일로, 그만큼 바쁜 학교가기로 설치는 아침 밥상에서도, 늦은 저녁 가족들 간의 다복한 밥상 자리에서도 죽어라 듣기 싫은 소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밥 먹다가 돌 씹는 소리 아닌가. 돌이라니! 햇반심으로 살고 고기심으로 살고 파스타심으로 살고 햄버거심으로 사는 청춘들은 모르리라.
벼 베기에서부터 벼 말리기, 타작, 방아 찧는 긴 과정에서 언제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쌀 속에는 늘 돌이 섞여들기 마련이었다. 돌은 검은 놈도 있고 노란 놈도 있고 쌀 빛깔과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놈도 많았다. 그러니 배고프고 시간 없다고 허겁지겁 밥숟갈 들었다가 오도독도 아니고 빠지직도 아니고 우드득도 아닌, 돌 씹는, 태초 이래 가장 기분 나쁜 음향을 듣는 일이 자주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조리, 그것도 정월대보름날 비싼 돈 주고 산 복조리도 쌀 속에 교묘하게 위장하여 섞여 있는 돌은 가려내지 못하던 것이었으니. 그로 하여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금니를 한 사람도 생겨나고 멀쩡한 이가 조각나 뻐드렁니처럼 생긴 사람도 생겨나게 되던 것이었으니.
쌀 속에 교묘하게 위장하여 숨어 있던 돌들도 제각기 냄새가 있었는데, 그것까지 구별할 만한 경험과 기억력의 소유자라면 그토록 넘기 어렵다던 보릿고개와 그렇게 거창하던 새마을운동을 함께 넘은 굽이굽이 이야깃거리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매우 높겠다. 대체로 검은 돌은 퍼석하며 깨져버려 이에 상처를 주지는 않지만 냄새가 시궁창이고, 단단한 차돌은 이를 박살낼 위험성이 다분하지만 특별히 코에 자극을 주지는 않고, 어쩌다 하얀 돌 가운데는 단단하지도 않고 퍼석하지도 않으면서 그 냄새 또한 ‘향기’라 불러줄 만한 것도 더러 없지는 않았으니. 그것까지 세밀하게 구별하는 힘이 있긴 있는 것일까.
사람은 사람 속에 섞여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좋은 역할도 하고 나쁜 짓도 하게 마련이다. 좋은 향기를 오래도록 남길 수도 있고 시궁창 냄새를 길이길이 풍길 수도 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비록 내가 쌀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그래서 밥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어 다른 사람의 입을 지나 위속에 들어가 그의 살이 되고 피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퍼석 부서져 시궁창이나 쓰레기통 같은 냄새를 풍기는 푸석돌(썩돌)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차피 돌인 이상 밥이 되긴 걸러먹은 인생이고, 그래, 단단하지도 않고 퍼석하지도 않으면서 냄새도 조금은 견뎌줄 만한 그런 돌일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2015.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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