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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즐거움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을 읽다

by 이우기, yiwoogi 2015. 3. 11.



1986~1987년이면 대학 1~2학년 때이다. 그때 씌어진 소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을 읽었다. 단편소설 11편이 얽혀 있다. 그 시절 우리는 민주화를 이야기하고 역사책을 뒤적였지만, 서울 위성도시인 부천시에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에서 떠밀려온 부박한 인생들이 고달픈 삶을 살고 있었던가 보다. 술 냄새 풍기는 주둥이로 민중문학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던 기억이 부끄러움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꼭 소설을 봐야 알겠나, 지금의 진주는 삼천포는 산청은 부천시 원미동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

 

눈은 책을 듣고 귀는 라디오를 읽는 게 일상이다. CBS 라디오를 거실에 켜 놓고 안방에 드러누워 마지막 작품 <한계령>을 읽는데 자꾸 눈이 아려온다. 30여 년 전 그때 부천에 살았던 간난한 삶이나 지금 진주에 사는 한심한 삶이나 어찌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 하는 데 감정이 다다른 것이다.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책장을 넘기는데 산울림의 <청춘>이 흘러나온다. 책을 덮고 3~4분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어 서유석의 <가는 세월>이 나온다. 제길, 오늘 날 잡았구나.

 

이문구의 <관촌수필>, 어쩔 수 없이 무인도에 일주일 정도 가 있어야 한다면 꼭 챙겨가고 싶은 것 중 하나다. 이제 <원미동 사람들>도 챙겨가야 하게 생겼다. 가방이 무거워질 것이다. 가방만 무거워지면 다행이게... 머리도, 마음도 무거워진다. 그 시절 원미동에 살던 사람들은 지금은 나이를 서른씩 더 먹어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되어 있을 것인데, 그들이 살아낸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는 집 화장실 수리하는 이야기다. 일꾼은 그다지 숙련공은 아니었던 듯한데 나름대로 깔끔하게 공사를 마무리한다. 의심의 눈초리로 봐왔던 주인과 일꾼이 한잔하러 간다. 묻는다. 날씨가 좋을 땐 이런 일이라도 하겠지만, 비라도 오면 뭐하느냐고? 비가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단다. 거기 무슨 고깃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트클럽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왠고 하니. 가리봉동에 있는 쉐타 공장 하던 놈한테 일년 내내 연탄을 대줬는데 이놈이 연탄 값을 떼어먹고 야반도주를 해버렸다는 거다. 그 돈 받으면 고향으로 내려갈 것이란다.

 

<지하 생활자>는 연립주택 1층에 딸린 지하 단칸방에 사는 총각 이야기다. 문제는 지하에는 화장실이 없다는 거다. 1층 주인 여자는 항상 집에 있을 터이니 언제든 화장실을 써라 해놓고는 단 한번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총각은 집 근처 으슥한 곳, 또는 길가에 세워놓은 트럭과 승용차 사이에다 실례를 한다. 회사에서는 배변이 도무지 안 된다. 주인집 여자는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가. 결혼한 유부남을 꾀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총각이 다니는 회사 동료들은 스트라이크를 일으키지만 사장이 내민 조금 두툼해진 월급봉투를 받아들고 그가 이끄는 회식집으로 간다. 그의 지하에는 항상 퀴퀴한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살아가는 것의 힘듦을 묵묵히 따라가는 작가의 눈길이 글 읽는 이의 눈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작가의 따뜻한 시선 덕분에 흙 속에 파묻혀 있는 줄로만 알았던, 아득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민초들의 삶은 구체성과 목적을 얻어 하나하나 되살아난다. 그렇지만, 되살아난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아스팔트도 아니고 보도블록도 아니다. 진흙탕이거나 울퉁불퉁 시골길일 뿐이다. 그래도 살아가야 할 까닭은, 사람 목숨은 개 목숨이 아니기 때문이고 나는 어찌되고 말더라도 남게 될 피붙이는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다.

 

<원미동 사람들>은 오래 전에 몇 작품을 읽었고, 2년 전쯤 다시 읽기 위해 새 책을 샀다가 까마득한 후배에게 줬고, 오늘 읽은 책은 설 연휴 때 어느 커피숍에 책 팔러 나온 대학생들에게서 산 것이다. 돈이 돌고 돈다지만 책도 돌고 돈다. 얼마나 좋은가. 어쨌든 그렇게 하여 결국 다 읽게 되었으니 퍽 다행이다. 양귀자 책을 몇 권 더 읽어야겠다.

 

그건 그렇고,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김창완은 어쩌자고 이런 노래의 제목을 청춘이라 하였던가. <한계령>의 큰오빠는 나이 쉰 줄에 들어서 어쩌자고 삶의 목적도 지향도 잃은 채 등 떠밀려 내려가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던가. 그에게 청춘은 어떤 것이었던가, 피고 또 지는 꽃잎 같았던가, 묻고 싶어진다. 내 나이 마흔아홉에...

 

2015.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