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산문 <소설가의 일>을 읽었다. 이 작가는 문단에서 꽤 알려졌고 고정 팬도 상당하다.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사 읽다가 책갈피를 접어 책꽂이에 꽂아뒀더랬다. 그러고선 잊어버렸다. 역사소설이나 민중소설, 사회소설, 또는 추리소설을 좀 챙겨 읽는 편인 내 입맛엔 영 맞지 않았다. <소설가의 일>을 읽으면서 다시 읽어보려고 찾았는데 안 보인다. 딴 사람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전에는 어떤 책을 누구에게 줬는지 기억했는데 요즘은 통 기억나지 않는다. <소설가의 일>을 다 읽고 나서는 다행이다 싶어졌다.
<소설가의 일>을 가령 ‘김연수의 창작론’이라고 하지 않고, ‘김연수의 소설작법’이라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김연수 산문’이라고 한 것은 왜일까.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에게 소설 쓰기를 가르치고는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그냥 산문이다. 수필 또는 에세이라고나 할까. 잡다한 자기 경험과 독서를 실컷 이야기해놓고 “그게 그래서 그런 거다.”라고 정곡을 찌른다. 그만큼 쉽게 읽힌다. 쉽게 읽히는 책은 자칫 주제를 놓칠 위험이 다분하다. 남의 차에 편안하게 앉아서만 여행하다 보면 아무리 많이 다녀봤댔자 길을 익히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릴케의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29쪽)는 말은, 김연수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일까. “(김연수가) 생각하는 젊은 소설가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그는 스물네 시간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한 가지 생각만 할 것이다. 문장들, 더 많은 문장들을. 자신의 것인지, 읽은 책의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 어디에서도 오지 않은, 전혀 새로운 것인지 구분이 모호한 문장들만을.”(30쪽) 그러니까 소설가는 문장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장, 아무도 말하지 않은 문장을 찾아 길을 떠나는 나그네이다. 나그네는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운명을 타고 났다. 행복하겠다!
“훌륭한 소설가가 되려면 원숭이보다 지혜로워서는 안 된다. 즉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입을 벌려서 감각해야만 한다.”(39쪽) 왜냐하면 “나의 사랑하는 주인공을 이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다.”(39~40쪽) “소설가는 이 세상이 더 많은 번뇌망상으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아무튼, 어딘가 좀 비뚤어진 인간일 수밖에 없다.”(40쪽) 김연수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나도 소설가가 될 수 있겠다.’고 하는 의욕과 ‘아, 나는 안 되는 것이로구나!’하는 자기인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될까.
용기를 얻고자 한다면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있겠다. “지금 초고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은 소설가에게 필요한 말은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하자는 것이다.”(54쪽) 그래서 소설가의 길로 발을 들여놓을 것인가. 그럴 수 있다.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가? 자꾸 되묻게 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소설가가 되기로 하고 이 책을 산 건 아니지만 김연수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을 해야 할 것 같아진다. 더 따라가다 보면, 김연수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아주 그럴듯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눈길 한 번 줌직한 소설 한 편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다르게 말하면 자기최면이 필요하다 하겠다. 왠고 하니 “소설가는 이 우주가 ‘나/주인공’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67쪽)이고 “소설가가 잘난 척하면 천생 소설가가 맞구나 하고 생각하면 되”(68쪽)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잘난 척하고(실제 잘나기도 했겠지), 자기중심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멀쩡한 사람이 어느 날 잘난 척하기가 쉽겠나, 이 우주가 나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그에 맞춰 말하고 행동하기란 또 쉽나. 소설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이다. 미친 척하는 게 아니라 미쳐야만 할 것 같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하지 않았나.
김연수가 말하는 소설가의 일은 대개 이렇다.
“우주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건 여러 번 고칠수록 문장이 좋아진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74쪽)
“‘자기가 쓴 것을 조금 더 좋게 고치기’가 바로 소설가의 주된 일이다.”(75쪽)
“만약 자기가 쓴 초고를 봤는데 토할 것 같다면 그건 소설가의 일거리, 즉 생각할 거리가 많이 생겼다는 뜻이다.”(77쪽)
“결론적으로 소설가는 모든 질문에 구체적으로, 그리고 핍진성 있게 대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핍진성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뜻이다.”(82쪽)
“소설가의 첫 번째 일은 초고를 쓰는 일이다. 쓸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소설가의 두 번째 일이고, 모르는 것을 알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게 세 번째 일이다.”(204쪽)
“자신이 잘 몰랐던 일들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방식은 흥미롭고, 미처 몰랐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뜻밖의 기쁨이다. 날마다 이 재미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 그게 바로 소설가의 일이다.”(232쪽)
“소설가는 앞으로 오백 년은 더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써야만 한다.”(243쪽)
“느리게 쓴다는 건 나만이 바라본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이 세계의 모습은 과연 어떤지 알게 될 때까지 쓴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어떤 플롯에 의해 짜여졌으며, 그 이유와 의미는 무엇인지 알 때까지 쓴다는 뜻이다. (그게) 소설가의 일이다.”(245쪽)
요즘 이런저런 글을 자주 쓴다. 수필도 아니고 소설은 더더구나 아니다. 물론 시도 아니다. 살아온 이야기, 책 읽은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데 대한 나의 의견 같은 것을 ‘괴발개발’(정확히는 글씨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써본다. 굳이 따지면 ‘창작글’이긴 하다. 무엇을 보고 베껴 쓴 건 아니니까. 이런 글은 그냥 ‘잡글’이라고 말하고 싶다. 잡글은 비빔밥 같기도 하고 육개장 같기도 하다고 본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용이나 주제도 마음대로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하려고 ‘노력’한다. 노력한다는 건 많은 잘못이나 실수 앞에서도 관대한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 한 가지는, ‘되도록 완전한 문장을 쓰자. 주제의 흐름을 일관되게 연결하자.’ 뭐 이런 게 되겠는데, 노력은 노력으로 그치고 실제로는 잘 안 된다. 김연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속삭여준다. “창작의 대략 팔십 퍼센트는, ‘아, 잘못 썼구나’라는 걸 깨닫는 시간이다.”(88쪽) 또 내 어깨를 토닥이며 이야기한다(세 살이나 어린 친구에게 어깨를 내민 건 내 정신나이가 더 어린 덕분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못 쓰고 못 쓰고 또 못 쓰기를 간절하게 원해야만 할 것이다.”(145쪽)
문장에 대해서도 한마디 들어본다. “소설의 경우에는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작가 자신마저도 귀찮게 만드는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 자기가 쓰는 문장이 소설에 합당한 문장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단어들로 이뤄졌다면, 소설 문장을 쓰고 있다.”(214쪽)
그러면 <소설가의 일>을 읽는 중간에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다시 찾아 읽고 싶었는데, 다 읽고 난 뒤에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딴 사람 줘버린 것을 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김연수 산문 <소설가의 일>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다. 말 그대로 창작론이다. 내용도 제1부 열정, 동기, 핍진성, 제2부 플롯과 캐릭터, 제3부 문장과 시점, 마치는 글로 이뤄져 있다. 이런 무미건조한 이야기를 재미있는 소설 읽듯 읽었는데, 또 무얼 보겠나 싶어진 것이다. 조정래나 황석영이나 김주영이나 김훈 같은 작가의 ‘소설 쓰기’에 대하여 찾아 읽어보고 싶어진 것이다.
2015. 2. 9.
'책 읽는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테일은 강하다, 무섭다, 위대하다 (0) | 2015.03.04 |
---|---|
허망하고 부질없는 삶에 대한 희망 (0) | 2015.02.22 |
심상대 장편소설 <나쁜봄>을 읽다 (0) | 2015.01.31 |
'상종할 수 없는 최악질 꼴통 기자'의 재판 지침서 (0) | 2015.01.30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읽는다 (0) | 2015.01.20 |